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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 유다인의 장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906 추천수0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 유다인의 장례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9,38-42).

 

 

유다인이 생각하는 죽음과 죽음 이후

 

예루살렘 동쪽 성벽 중앙에 위치한 황금문 주변부터 키드론 골짜기를 지나 올리브 산까지 가다 보면, 많은 유다인과 무슬림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도 불리는 황금문 가까이 있는 무덤부터 죽었던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은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생각하여, 육체가 현존하는 한 영혼도 존속한다고 여겼으므로 시신을 소중히 다루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임종과 염습

 

유다인은 사람이 숨을 거두면 대개 임종을 지키던 아들이 눈을 감겨 주었습니다(창세 46,4 참조). 가족은 시신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창세 50,1 참조), 시신 앞에서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친척과 친지들은 유족을 위로하였는데, 예수님께서도 라자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3-35 참조). 한편 직업이 ‘곡꾼’인 이도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소란을 피우며 우는 곡꾼들과 맞닥뜨리기도 하셨습니다(마르 5,38-39 참조).

 

유다인은 흙에서 온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도록(창세 3,19 참조) 가능한 빨리 장례를 치렀습니다(창세 23,2-4; 35,19 참조). 이는 팔레스티나의 무더운 기후 탓도 있습니다. 먼저 시신을 물로 깨끗이 닦고(사도 9,37 참조) 냄새를 막기 위해 향료를 뿌리고 향유를 발랐습니다(루카 23,56 참조). 이어 폭이 좁고 긴 무명이나 아마포로 시신의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모두 감쌌습니다. 예수님께서 되살리신 라자로가 이런 모습으로 무덤에서 나왔고(요한 11,44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에도 이 흔적이 있었습니다(요한 20,6-7 참조).

 

 

매장과 장례 이후

 

예수님께서 되살리신 나인의 과부 외아들의 장례 행렬처럼 가족과 친지, 이웃은 무덤까지 함께 갔습니다(루카 7,12 참조).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한 중앙 산지는 거대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기 때문에, 장례 당일에 매장하기 위해서는 바위를 미리 파서 무덤을 준비해 두어야 했습니다. 이 무덤은 시신을 안치하는 벤치와 석관을 놓는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입구는 둥근 돌로 막고 돌 밑에는 홈을 파 돌을 움직이기 쉽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누가 이 돌을 굴려 줄까 하고 걱정했습니다(마르 16,3 참조). 시신을 안치한 뒤 무덤 입구를 막아 봉인하고 무덤을 표시하는 회칠을 하는 것으로 장례 절차는 끝났습니다.

 

장례 후 대개 30일 동안 곡을 했으며, 유족은 사흘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흘이 되어야 확실히 죽음을 맞이하고, 나흘째부터 시신이 부패한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 11,39 참조). 매장 후 1년쯤 지나 살이 부패하고 뼈만 남으면 뼈를 추려 석관에 보관했습니다. 뼈를 보존하는 것은 부활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벌초하듯 기일에 무덤을 찾아가 다시 회칠을 해서 단장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역사를 완결하는 결정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에게서 영원한 삶을 선물로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폐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아가는 것이며, 운명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날’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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