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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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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Paulus

   바오로 3세(1468-1549). 교황(재위 : 1534-1549). 본명 Alessandro Farnese.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출생. 여러 주교직을 역임한 후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물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대표적인 르네상스기(期)의 교황이었지만, 가톨릭 교회의 내면적 개혁에 공헌이 컸다. 종교개혁에 대해서 처음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후에 점차 이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영국헨리 8세를 파문하여(1538년) 프로테스탄트를 적극 배격하고, 예수회 설립을 승인(1540년) 이탈리아이단 심문소를 설치하여(1542년)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려고 하였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1545년), 이단을 배격하고 가톨릭 교회 신앙 수립에 힘썼다. 예술. 학문을 애호하고, 미켈란젤로를 옹호하여 그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임 건축사로 채용했으며, 유능한 학자들을 로마대학에 초빙하고, 바티칸 도서관을 충실(充實)하게 하였다. 독일 황제 칼 5세를 후원하여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諸侯)를 토벌하기 위해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노력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영국로마와 소원해지는 등 만년은 암담하였다.

   바오로 6세(1897-1978). 교황(재위 : 1963-1978). 본명 Giovanni Batista Montini. 이탈리아 브레샤(Brescia) 부근의 콘체시오(Concesio) 태생. 선대의 두 진보적 교황 비오 12세와 요한 23세를 이은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교황의 한 사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종결짓고 그 개혁정신을 대대적으로 실행, 파급시켰다, 이탈리아 북부 콘체시오의 부유한 인텔리 지주 가정에서 출생. 1920년 서품 뒤 30여년을 교황의 외교관 및 바티칸 사절로서 근무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 산업의 심장부인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공산당의 비난하는 표적이 되었지만, 기업주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경제적인 복지 향상에 노력, '노동자의 대주교'로 호칭되었다. 1958년 요한 2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 1회기에 사무관으로 참석하였고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즉시 선임자의 과업을 이어 공의회를 속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의 사상은 첫 회칙 (1964. 1. 4)에 집약되어 있는데 ‘평화의 사도’, ‘교회일치의 주역’으로 불렸던 이 교황의 치적은 대내적으로는 교회내의 개혁과 성청(聖廳)의 개혁, 대외적으로는 사회정의의 추구와 외교활동 및 교회일치의 노력 등으로 대별된다.

   대내적으로는 모든 인공피임을 금지한 최후의 교황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 1968. 7. 29)을 발표하였고, 사제독신제를 고수(1967. 6. 24)하자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2,414조에 달하는 교회법에 대한 전면 개정작업에 착수, 혼인취소승인을 자유화하고 사순절 단식이나 금요일 금육을 어긴 자에 대한 대죄의 벌을 교회법전에서 제외시켰으며 교회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신자들이 읽을 수 없었던 금서목록(禁書目錄)도 제거하였다. 또한 평신도여성의 교회내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여성을 성청의 관련 부서에 근무하게 하였으며 주교 시노드를 열어 교황청의 자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맡겼다. 그밖에 정의인권의 보호를 위한 정의평화위원회, 그리스도교 일치국, 비(非)그리스도국(局) 등을 신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0년 동안 교황청 외교인단에서 활약한 경험을 살려 재위기간 중 한국을 위시하여 40개국 이상에 걸쳐 새로 외교관계를 수립, 그 중 반수 이상이 아프리카 국가였다. 세계의 현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제20차 유엔 총회에서의 전쟁 종식과 군비 축소를 위한 연설(1965. 10. 4),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노동기구에서의 연설(1969. 6. 1) 등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우간다를 방문(1969. 7. 31),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문제에 직접 개입하였는가 하면 아프리카의 참상을 목격하고 세계기아기금 창설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8개국을 순방(1970. 11. 26-12. 15)했고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의 메이어 수상 외에 공산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소위 ‘동방정책’을 끈기 있게 추구, 유고의 티토 대통령, 루마니아의 초세스쿠 수상 등과 개별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및 정교회와의 대화를 진전시켜 성지를 방문(1964. 1), 그리스 정교회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회담하고, 1054년의 동서방교회의 분쟁에 대해 서로 화해하였다(1967. 10).

   루터교. 칼빈교, 재림교와의 대화도 추진하였는데. 그러나 대화를 통한 변화가 가능한 곳에서는 그 변화를 허락하고 장려하였지만, 그것이 교회일치의 본래의 목적에 적합한 것인가를 숙고, 필요에 따른 제재를 가하였다. 후자는 급진적 교회 일치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교파간의 상호 영성체가 완전한 교리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을 경우에 해당한다. 1978년 8월 6일 “굶주리고 병들고 일자리가 없는 자들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