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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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모렐◆ 인쇄

원어명 Vermorel, Joseph

   Vermorel, Joseph(1860-1937). 파리 외방전교회원. 교구선교사. 한국명 장약슬(張若瑟). 1860년 3월 28일 프랑스 리용(Lyon) 교구의 생 클레망 드베르(Saint Clement de Vers)에서 출생.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7년 9월 24일 사제신품을 받고 고국을 떠나 1888년 1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뒤 1918년에 맹장수술을 받으러 북경에 갔던 일을 제외하고는 50년 동안 한번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이 오직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한국에 도착하자 곧 첫 임지인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그는 서울에서는 이미 볼 수 없게 된 상복을 입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891년 보두네(Baudounet) 신부와 함께 피정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도중 도둑떼를 만나 모든 것을 강탈당하는 등 갖은 박해를 겪으면서도, 그는 인내와 관용으로 가난교우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였다. 1893넌 리우빌(Liouville) 신부선종하자 그 후임으로 용산신학교에 부임하여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어 원산(元山)본당을 1년간 맡고 있을 때 간도(間島)에서 찾아온 김영렬(金英烈)이라는 청년에게 영세를 주어, 간도에 돌아가 복음을 전파케 함으로써, 장래의 연길교구가 탄생하게 하였다.

   1897년에는 강경(江景) 가까이 있는 나바위에 본당을 건립하였다. 나바위 본당에 있을 당시인 1899년 교우와 외교인 사이의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폭도들이 베르모렐 신부댁을 습격하고 신부를 강경포(江景浦)까지 납치한 강경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를 거쳐 평리원(平理院)의 판결로 6개월만에 종료되었다. 1911년 대구교구가 분립되면서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1919년 드망즈(Demange)주교가 주교회의 참석차 로마로 가 있을 동안 잠시 주교좌성당에 가 있었을 뿐 1931년까지 나바위 본당을 떠나지 않았다. 1931년에 연로하여 본당 사목직을 떠나 성 바오로 수녀원의 지도신부가 되어 고아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여생을 바치다가 1937년 5월 31일 77세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