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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佛敎

   불교란 깨달으신 분, 즉 '부다'(Buddha, 覺者, 佛)의 가르침을 말한다. 불교는 원어로는 Buddha-sasana 인데 이 말은 원시경전 중에 "모든 악은 짓지를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네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다의 가르침'(諸佛敎)이니라"라고 한 구절 중 마지막 한 마디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스스로 어떤 서구적 개념인 종교(religion)의 하나이거나 주의(ism)이기를 거부한다. 그렇지만 이른바 종교의 기본요소인 교조 · 교리 · 교회, 이 세 가지 범주에 비추어 불교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셋을 불교의 세 가지 보배, 즉 삼보(三寶, tri-ratna)인 불(佛, Buddha) · 법(法, Dharma) · 승(僧, Samgha)에 해당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셋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법으로서, 결국 이 삼보의 해석은 법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데 따라 천심(淺深)의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편의상 여기서는 불교를 이 삼보의 범주에 따라, 그 해석의 천심을 염두에 두고 설명해 갈 것이다.

   1. 불 : 역사상 구체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불은 인도 마가다(Magadha)국의 태자로 태어난 석가모니(’Sakyamuni, 釋迦牟尼, 釋迦族의 聖者)불이다. 그는 기나긴 전생(前生, 혹은 本生)을 보살(菩薩, 팔리어로 Bodhisatta, 산스크리트어로 Bodhisattva)로서 온갖 수행을 다 겪은 후, 그 과보로서(인간의 본능적 욕정에 의해 필연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자신의 대원력(大願力)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80세에 입멸(入滅)[영원한 본래의 모습에 듦]할 때까지 성자(聖者)로서의 일생을 보내셨다.

   이러한 최상의 인간[無上士], 완전히 지혜롭고 자비로운 인간[明行是], 신과 인간의 스승이며[天人師], 세상의 존귀한 어른[世尊]이신 인간 석가는 그러나 영원한 법 자체로서의 부다, 즉 법신불(法身佛, Dharmakaya)을 체(體)로 하는 상(相)이요, 용(用)일 따름이다. 법신불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체로서 일정한 시작과 끝이 없이, 언제나 시작이요, 언제나 끝이 되면서 그 모든 구성원들간의 질서와 화합을 이루는 근본생명력이다. 법신의 상(相)을 보신(報身, Sambhogakaya) 또는 수용신(受用身), 그 용(用)을 화신(化身, Nirmanakaya) 또는 응화신(應化身)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석가모니불은 이 세 가지 몸[三身]을 다 갖췄다고 해야 마땅하며 그의 입멸과 함께 인간 석가로서 나타났던 보신과 화신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신불은 영원한 것이며, 우리 모든 중생이 그를 떠나 있지 않고, 언제든지 그 수행의 좋은 과보로 보신을 나타낼 수가 있고, 그 개안(開眼)의 정도에 따라 인간은 그 화신을 볼 수 있으며, 또 그 스스로 화신이 되고 있다.

   2. 법 : 법이란 말은 불교가 성립 출현하기 이전 베다시대부터 이미 인도에 있던 개념이다. 흔히 의무, 지켜야할 법칙 따위의 뜻으로 쓰였다. 한편으로는 '있는 것들' 즉 현상사물(事物)을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 부다는 바로 이 우주자연 속의 제현상 사물이 나타내 보이는 법칙, 도리를 깨닫고, 그 법칙과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생각하며 말하며 생활하게 된 성취된 인간이다. 그 자신이 법을 나타내고 법을 말하고, 그 생각이 법에 어긋남이 없다. 오직 인간의 마음가짐이 혼미해서 이 법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그 법을 따를 수 없어 그 자신과 이웃의 화합(integration)을 깨뜨리고 대립과 갈등을 야기할 때,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을 중생(衆生, sattva)이라 한다.

   불교의 성전(聖典)인 삼장(三藏, tri-pitaka, 즉 經·律·論), 또는 대장경(大藏經)[중국에서 편집 종합된 三藏과 중국찬술의 주석서, 역사서 등을 총망라한 것]은 법에 과해 설하신 부다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 중 경(經)은 가장 기본적인 법의 핵심을 수록한 것이고, 율(律)은 부다를 따라 수행하는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제반 율의(律儀)를 담은 것이고, 논(論)은 부다가 직접 설하신 법의 내용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부연설명을 담은 것이다. 법의 설명은 듣는 사람들의 이해의 정도, 견식의 차이에 따라 그 깊이에 차이가 생겼다. 이것은 시간적 차이로도 나타났다. 초기의 경전은 대체로 인과응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적인 법을 강조했고 또 출가한 승려를 주대상으로 설한 것이며 얼핏보면 현실부정적 염세적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초기 경전에 실린 법의 내용은 그 후 각 부파(部派)의 학승들에 의해 상당히 세밀하게 분류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리하여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서(論書)들이 나타났다. 이 논서에는 그러나 '법'이란 이름 밑에 '개념'들이 무수히 실체화되는 경향이 생겨, 서기전 1세기경부터 발생하는 대승불교 설법자들에 의해 그 잘못이 논박되기에 이르른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사상을 높이 쳐든 대승불교 설법자들은 석가모니불의 설법내용 중 초기 경전에서 자세히 그리고 깊이 천명되지 않았던 근본핵심 사상들을 힘주어 새롭게 강조하는 여러 가지 경전들을 편찬했고, 이에 따른 방대한 논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반야바라밀다사상은 모든 대승경전의 기본사상이 되고 일체의 사물이 인연따라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항구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공(空)의 인식을 강조하여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하였다. 대승불교는 반야경의 이런 무아(無我), 공의 인식에 입각해, 인간 완성의 궁극인 부다의 경지를 이루는 필수조건으로서 보살(菩薩)로서의 수행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이 중생의 삶에서 '깨달은 중생" 즉 보살(bodhisattva)의 삶으로 혁명적인 자기전환을 이룩할 것을 강조한 것이 모든 대승경전의 공통된 설법내용이다. 유마경(維摩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능가경( 駕經), 해심밀경(解深蜜經), 승만경(勝 經), 무량수경(無量壽經), 화엄경(華嚴經) 등이 주요한 대승경전이다.

   논서로서는 용수(龍樹, 150∼250)의 중론(中論), 대지도론(大知度論), 미륵(彌勒, 270∼350)의 유가론(瑜伽論), 보성론(寶性論), 무착(無著, 310∼390)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세친(世親, 320∼400)의 유식론(唯識論), 마명(馬鳴, 2세기)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등 다수가 있다. 이러한 문헌들은 요의경(了義經)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법의 깊은 의미가 담겨진 것으로 간주되어 불요의경과 구별된다. 그러나 정법(正法)의 이해는 문구에만 의거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는 자신의 지혜의 계발로써만 얻어지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 보살에게는 계(戒)를 바르게 지키고, 항상 선정(禪定)에 힘쓰는 수행이 절대필수의 요건임이 강조되었다.

   3. 승 : 승이란 인도말 상가(僧伽, Samgha)의 준말로 화합된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 구성분자들을 세속적 생활을 등지고 출가한 비구 · 비구니와, 세속생활을 계속하는 재가 신도 우바새 · 우바이의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못박았으나, 이러한 출가 은둔주의적 '상가'관은 대승불교의 대두와 더불어 바뀌어 모든 중생이 다 여래(如來), 즉 부다가 될 수 있는 씨알로서 이 중생들의 공동체가 그대로 '상가'란 매우 깊이 있는 해석까지도 나타났다. 신라의 원효 같은 이는 이런 광범한 '상가'관을 갖고 이를 선포한 사람이다.

   한국의 불교 1. 역사적 전개 : 한국 불교의 역사는 대략 왕조를 따라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372∼917년) : 불교의 수용(受容)발전시대 ② 고려시대(918∼1392년) : 불교의 난숙시대 ③ 조선시대(1392∼1910년) : 불교의 쇠퇴시대 ④ 일제식민지시대(1910∼1945년) : 과도적 시대 ⑤ 광복후(1945∼현재) : 불교중흥모색시대

   1984년 현재로서 불교 수용 1612년이 되는 한국불교는 조선시대까지 1020년 동안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철학사상으로서 우리 민족의 기간 정신문화의 구실을 해왔다. 고려의 말기에 성리학이 수입되고 불교 계 자체의 타성적 쇠퇴현상이 드러남에 따라 싹튼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14세기 말부터 불교의 명맥은 끊어진 듯 보이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불교는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옴으로써 한국의 종교, 한국의 철학을 다룸에 있어서 불교는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의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①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수용 및 발전 :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堅)이 불상과 불경을 순도(順道)란 스님을 시켜 전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2년 후 아도(阿度)화상이 오고 그 후 이 두 스님을 각각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란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 불교가 백제에 들어간 것은 384년 인도승 마라난다가 궁중에 맞아들여짐으로써 한산주(漢山州)에 절이 세워지고 승려 10여명이 탄생한 후부터이다. 신라에는 이보다 훨씬 늦게 눌지왕(訥祗王, 417∼452) 때에 아도(阿度) 또는 묵호자(墨胡子)라는 이가 오면서부터인데, 당시 불교는 아직 공인되지 않고 있다가 527년에 와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왕과 대신들 사이에서 불교수용의 일치된 결의가 생겼다. 불교는 가장 민주적 방식으로 신라에서 공인되고 그후 가장 착실한 불교신앙의 발전이 이뤄진다.

   결국 불교는 신라의 국력 배양의 원동력이 되었고 신라문화의 근간이 되어 삼국통일을 달성케 하고, 나아가 한민족의 전통문화의 근간이 되게 하였다. 신라시대의 불교사를 제1기 눌지왕에서 무열왕까지(417∼660)의 수입시대, 제2기 문무왕에서 애장왕까지(661∼808년)의 교종분립시대(敎宗分立時代), 제3기 현덕왕에서 경순왕말까지(809∼935년)의 선종울흥시대(禪宗蔚興時代)의 3기로 나누는 학자가 있다. 명칭에는 이론이 있지만 대체로 이러한 시대구분은 타당성을 갖는다. 제1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527년의 이차돈 순교 이후 왕들과 그 주변의 지배층 인물들의 신불(信佛)의 태도가 열렬하고 많은 탁월한 인재들이 모이고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왕실의 불교 경시는 그 전제적 비도덕적 성격과 부합했었다. 그리하여 혜량(慧亮)과 같은 고승이 신라로 넘어와 이곳의 승통(僧統)이 되고, 유능한 인재들을 양성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현광(玄光), 안홍(安弘), 원광(圓光) 지명(智明), 담육(曇育), 명랑(明朗), 자장(慈藏), 원효(元曉), 의상(義湘) 등의 지도적 인재가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또 이들과 긴밀한 유대 아래 국왕 대신 장군, 청년 엘리트까지가 그 지성과 실천적 덕성이 탁월한 능력자로 성장하였다.

   제2기를 교종분립시대라고 칭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종파의 형성 분립은 아직 확고하지 않지만 후대에 그 종파들이 중시하는 주요 대승경전의 연구와 교육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시기가 이 제2기이다. 역시 고구려 출신의 승려인 보덕(普德)은 열반경을 자장은 율장(律藏)을, 원효와 의상은 주로 화엄경을, 진표(眞表)는 유가·유식계통의 이론을, 명랑은 밀교경전을 주로 연구했다고 이해하면 좋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특정한 한 가지 경전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제3기는 선문구산(禪門九山)이라고 하여 중국에서 성립된 선종(禪宗)의 제파(諸波)가 차례로 신라 땅에 수입 전래된 시기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한편 교학(敎學)연구가 쇠퇴하고, 일반적으로 불교계의 기강이 해이된 시기라고 보아도 좋다.

   ② 고려시대의 불교 ㉮ 전기 : 고려왕조의 시조 왕건(王建)은 그 아버지 왕융(王隆)이 가깝게 지내던 도선(道詵)의 주력(呪力)을 크게 신뢰하는 주술적 신앙심을 갖고 불교를 믿어 온 말하자면 건강치 못한 신심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왕건의 태도는 고려의 전시기에 걸쳐 불교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예시(豫示)하는 징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개성 내외에 십대 가람을 설치하고 또 천호산(天護山)에는 개태사(開泰寺)를 지어 이른바 호국의 도량으로 삼는다. 훈요십조(訓要十條)도 완전히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사로잡혀 있고, 팔관회(八關會) 등의 갖가지 법석(法席)도 온통 기복양재(祈福禳災)의 의미를 가졌을 뿐 불교의 반야사상이라든가, 보살도의 이타행 실천이라든가 하는 교리 이해와 실천적 윤리의식 따위는 크게 문제가 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외형상 완전히 불교국가의 면모를 갖춘 시기이었지만 이 시기의 불교는 너무나 형식에 치우쳐 사람들의 마음을 나약한 타력신앙 쪽으로 몰고 가 자력으로 모든 시련과 도전에 대처해 이를 극복할 만한 힘을 키우지 못하고 만 느낌이 짙다.

   광종(光宗) 때에는 승과(僧科)를 두어 승려를 국가에서 선발해 대우하였는데, 이 시기에 활동한 고승으로 국사(國師) · 왕사(王師)가 되는 이가 많았다. 탄문(坦文), 균여(均如), 결응(決凝), 정현(鼎賢), 해린(海麟) 등이 교종(敎宗) 출신의 국사들이었고, 찬유(璨幽), 긍양(兢讓), 지종(智宗) 등이 선문 출신의 국사들이었으며, 왕자로서 출가하여 국사가 된 사람도 많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었다. ㉯ 후기 : 성종(成宗) 때의 재상 최승로(崔承老)는 시무28조(時務28條)를 써 바쳐 그 안에서 불교의 폐단을 말하고 있다. 희종(熙宗) 때에는 지눌(知訥)이 가지산(迦智山) 문하에서 나타나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몽고족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불교의 밀교화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한편 신돈(辛旽)과 같은 요승들이 왕실주변에서 발호함으로써 유생들 사이에 배불의 풍조가 거세게 일게 되었다.

   ③ 조선시대의 불교 : 태조(太祖)의 개국(1392년)으로부터 문종(文宗) 말년(1455년)까지 63년간을 우리는 불교에 대한 압박이 절정에 달한 시기라고 본다. 태조는 개인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심을 유지하고 조탑 · 조사(造塔 · 造寺), 도량(道場)의 개설 등을 하며 기복적인 신앙을 나타냈으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등 유신(儒臣)의 강한 반발로 사태는 달라져 태종 때에는 배불(排佛)이 절정에 달하였다. 금중(禁中)에 두었던 송주승인(誦呪僧人)을 없애고 사찰의 논밭과 노비를 군용으로 돌리고, 사찰수를 줄여 전국에 11종(宗) 242사찰만을 지정 유지케 하고 나머지는 다 폐지시켰다. 이 시기의 배불정책으로는 승려의 성외 축출, 도승법(度僧法), 승과, 승록사(僧錄司)의 폐지, 기타 상(喪)을 입은 사람들의 사찰 출입과 사찰에서 불공 또는 재를 드리는 것 등의 금지가 각 방면에 미쳤고, 세종 때에는 두 차례에 걸친 합종(合宗)을 단행하여 조계(曹溪) · 천태(天台) · 총남(摠南)의 삼종계를 선종(禪宗)으로 묶고, 화엄 · 자은(慈恩) · 중신(中神) · 시흥(始興) 등을 교종(敎宗)으로 하여 선·교 양종으로 축소시키고 전국에 3,720명의 승려만을 남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세조(재위 : 1456-1468)의 일대와 명종(재위 : 1546-1566)의 초기, 선조(1567-1607)의 말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왕실의 봉불(奉佛)이 적극적이 되매, 조선시대의 불교는 아주 절멸되지 않고 그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왕권의 변덕스런 개입이 불교의 성쇠를 결정지은 것 같기도 하지만 다시 세밀히 판단해 보면 결국 불교계 현실의 타락이 그 쇠퇴를 자초했고, 불교 본연의 불변하는 가치가 다시 그 명맥을 유지케 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위의 세 국왕의 신불태도에는 여전히 기복적 성격이 짙었고, 이들의 종용을 받은 신미(信眉)나 보우(普雨), 휴정(休靜) 등이 그 불교 애호자를 어느 정도로 정법(正法)에 가까이 인도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의심스럼다.

   인조(仁祖) 때부터 일본의 한국강점까지(1623-1909년)는 여전히 유교의 결벽주의적 배불태도로 말미암아 전반적으로 불교의 바람직한 발전은 이뤄지지 못하고 불교는 때로 기복적 목적에 이용되거나 또 때로는 승려들의 집단적 노동력이 이용 대상이 되는 가운데, 간신히 산사에 칩거하여 소극적 수행생활을 지속해 갈 수밖에 없었다.

   ④ 일제 식민지시대가 시작됨과 때를 같이하여 불교의 일본화 공작이 시도되면서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 등 약간의 숨통이 트이기는 하였으나 이 시기의 한국 승려들간에는 공연한 파벌 대립만이 노출되었고, 실질적 불교 발전이 이룩되지 못하였다. 오랜 정체생활로 인한 갖가지 여건의 결핍은 주로 충실한 교육을 통해 메워져야 했었는데,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불교계는 공전만 거듭했고,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용운(韓龍雲)이 조선 불교유신을 절규하지만 그 해답은 다음시대로 미뤄지는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 40년이 가까운 기간 동안 불교중흥의 소리는 끊인 날이 없었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교육도 진행되어 왔지만, 비구·대처간의 파벌싸움으로 불교계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오다가 조계 · 태고 양종으로 각각 제자리를 굳혀 이 분규가 종식된 후에는 조계종 내부에서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쓸데없는 힘의 낭비만을 일삼아 왔다. 다만 광복 후 한국 불교계는 재가신도들 사이의 보살 운동이 점차 확대되고 있어 이것이 하나의 자극이 되어 전통 종단 자체의 각성이 이루어질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2. 한국불교의 특색 ① 샤머니즘의 영향 : 한국불교가 영향을 입은 샤머니즘의 특징은 인생(人生)의 길흉이 모두 귀신이나 사령(死靈)의 은혜와 분노에 비롯된다고 생각, 무당과 굿을 통해, 기복 양재하고 현세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데에 있다. 이 샤머니즘의 특징은 깊은 공부가 없는 불교 승려, 신도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져 우리 불교는 때때로 샤머니즘인지 불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변용(變容)을 보였다. 이는 한편으로 한국의 서민생활이 대체로 매우 절박한 곤경에 처해 있어서 그들 서민들에게는 이러한 위안의 수단이 필요했던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깊은 철학적 의문이나 반성에는 큰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오직 6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는 기간 신라의 고승들의 영향 아래에서만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②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에 대하여 : 호국불교라는 말은 불교가 왕실에 의해 도입되어, 왕실의 비호 없이는 명맥의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왕권 또는 국가 지배 세력에 의존되어 왔고, 한편 불교가 왕실과 국토 그리고 신민을 천재지변, 갖가지 질병과 액운, 외적의 침입, 사회의 혼란 등에서 수호하는 데 긴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로 이것은 이미 중국에서 확립된 성격이지 결코 한국 불교만의 독자적 경향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또 둘째로는 호국사상의 근거가 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이나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등에 의하면, 호국이란 반야바라밀다 즉 지혜의 극치를 이룩함으로써 한 개인 또는 가정, 민족, 국가 등 갖가지 유기적 집단의 생활, 즉 그것이 국토이지만, 그 국토가 잘 지켜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앞서 말한 신라불교 전성시대에는 잘 이해하고 실천되어 좋은 성과가 있었으나, 이후의 시대에는 샤머니즘 기복신앙과 결부되어 내면적 정신 자세의 함양보다는 외형적인 의식의 주력을 믿는 쪽으로 흘러감으로써 타락상을 보이고 불교 자체에도 큰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③ 종파주의를 지양하려는 원융회통(圓融會通)적 진리 이해 : 신라의 원광으로부터 시작하여 원효에 이르러 불교의 요의경전(了義經典)의 깊은 연구를 통해 모든 불교교설의 종합적 체계적 이해가 이루어지자,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의 가르침, 나아가서는 다른 조요의 교훈까지도 중도제일의체(中道第一義諦)로 모순 없이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관용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융회통사상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진리 이해의 방식, 진리 실현의 방식에 의하여 중생은 아무도 소외당함이 없이 수용되는 섭수(攝受)의 정신이 보급되게 하였다. 아마도 한국 불교가 세계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사상적 기여를 한 것을 들라 하면, 원효에 의해 화랑도로써 구체화된 이 하나를 이 하나를 이룩하려는 정신일 것이다. 원효는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라"고 하였다. 그것은 '화쟁'(和諍), 이론싸움, 말다툼을 없게 화해시키라는 뜻이기도 하다. 원효는 종파가 대립적 아집(我執)이나 법집(法執)의 소산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함을 지적하고, 참된 자기실현의 방편으로서 잠정적 방편의 의미가 제대로 살려지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부정, 무소유의 자각이 투철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고려의 의천(義天, 1055-1101)이나 지눌(知訥, 1158-1210), 조선조의 기화(己和, 1368-1433), 휴정(休靜, 1530-1604),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한용운(1879-1944) 등은 한결같이 원효의 이러한 원융회통적 이상을 다시 재흥 소생시킬 것을 염원한 우리 불교역사상의 정통(正統)을 잇는 지도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李箕永)

   [참고문헌] 權相老, 朝鮮佛敎史槪論, 佛敎時報社, 1939; 朝鮮佛敎史藁, 中央佛敎專門學校(등사본), 1940 /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上 · 中 · 下, 慶熙出版社 影印本, 1968 / 禹貞相 · 金 泰, 韓國佛敎史, 1969 / 李箕永, 한국의 불교,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4 / 韓國佛敎硏究, 韓國佛敎硏究院, 1983 /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 春秋社, 1930; 同 한국어역 鄭湖鏡, 朝鮮禪敎史, 寶蓮閣, 1980.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