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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Blanc, Jean Marie Gustave

   Blanc, Jean Marie Gustave(1844-1890).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1866년 12월 22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이듬해 2월 15일, 파리를 떠나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병인(丙寅)박해로 두 조교를 함께 잃고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Ridel)신부를 만나, 함께 조선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 10년 동안 리델 주교를 도와 교리책의 번역과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1876년 리델 주교, 드게트(Deguette)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나, 5월 8일 리델 주교를 다시 청국으로 되돌려 보낸 다음 조선땅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목자를 다시 갖게 된 조선 땅을 숨어 다니면서 그는 전교에 힘쓰는 한편, 다시 주교를 맞을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그 결과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를 다시 맞게 되었으나 곧 주교가 잡히는 몸이 되어 추방되자 주교없는 한국 교회를 지켜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1882년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끼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조선에 돌아와 더욱 전교에 힘써 1887년말에는 14명의 성직자 14명의 신학생과 신자수 1만 5000명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 박해로 거의 다 쓰러져가던 조선 교회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1887년 9월 21일에는 조선 교회의 지도서를 공포하여 통일된 법전을 갖고 규칙에 따라 교회 행사를 집행할 수 있게 했고, 1888년 6월 8일에 조선교구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장엄한 미사를 올려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최후의 승리를 감사드렸다. 한편 방인 성직자 양성에 힘써 1885년에 강원도 부흥골에 신학교를 설치하여 페낭유학생을 포함한 신학생을 수용하였고, 2년 뒤에는 용산으로 옮기었는데 그때의 신학생수는 21명이었다. 고아와 노인들을 위한 사회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1885년에 서울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40명의 노인과 100명의 고아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 사업을 위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여 4명의 수녀파견받아 그들로 하여금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대지를 사들여 1887년부터는 종현(鐘峴)의 산등을 깎아 1890년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2월 2일 이를 감사하는 미사를 드리고 곧 주교관을 세우려 했으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2월 21일 46세로 선종하였다.

   [참고문헌] Compte Rendu (1890), Paris 1981.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