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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인쇄

한자 三位一體
라틴어 Trinitas
영어 Trinity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적 신비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로 구별되어 파악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체적 인간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고,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서로부터 출발한다. 성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계시사(啓示史) 안에서 증언되는 하느님 성부성자성령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이다.

   1. 성서상의 삼위일체 : ① 구약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그늘이라고 신약에서 진술되고 있으나 (1고린 10:11, 갈라 3:24, 히브 10:1), 종교사적으로 구약은 엄격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교부들이 일부 구약성서의 본문들이 삼위일체 신비를 암시한다고 간주한 바 있다. 창세기에서의 '우리' 형식(창세 1:26, 3:22, 11:7, 이사 68),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 남자들의 방문(창세 18:1-16), 민수기에서의 야훼의 삼중축복(민수 6:24-26), 이사야에서의 세라핌의 '거룩하시다' 삼회찬미(이사 6:3) 등을 말하는 본문들이 삼위일체의 사전계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신빙성이 약하다고 오늘날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보다는 구약이 엄격한 유일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충만함이나 외부지향의 계시를 지니고 있는 지가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역사 한가운데에서 현존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특정 중개형식(仲介形式)의 명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야훼의 천사'(malakh Jahwe), '지혜'(Chokma), '하느님의 말씀'(dabar Jahwe), '성령'(ruah) 등의 실재에 대해서 기술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바로 하느님의 직접적 작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개념들이 '위격'을 그대로 지칭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신약에서 증언되는 삼위일체 신비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② 신약성서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현시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신성(神性)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며(마태 12:28, 루가 11:20)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반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全權)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병행구), 더 이상 앞지를 수 없는 하느님의 임재(臨齋)이며(마태 11:25 이하, 요한 10:30), 성령의 충만이다(루가 4:18). 그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이 명백히 증언되고 있다(요한 1:1-18, 필립 2:5-11).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이 하느님과 조물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적이거나 종교적 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으로서 하느님 구원의 충만이다(루가 4:18, 디도 3:5 이하, 1고린 12:4). 예수 자신은 성령(pneuma)에 대해서는 드물게 언급하고 있고(마르 3:28-30), 그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지칭된다(마태 12:31, 루가 12:10). 부활이후에 성령의 출현이 보도된다. 성령이 전 교회공동체 안에서 체험된다는 증언이 이루어진다(사도 2:1-41, 4:31, 8:15-17, 10:44, 19:6). 이 성령그리스도 계시와의 일치 안에서 역사한다(로마 8:11, 필립 1:19, 2고린 3:17, 갈라 4:66, 1요한 4:1-3).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성부성자성령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성부성자성령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6:7, 17:3, 갈라 4:6), 성자성령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1고린 2:10). 이를테면 구체적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의 파악 불가능성을 체험케 하며 따라서 성부와의 구별을 체험케 한다. 신약성서성부성자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여기서 성부성자성령구원작용이 구별되어 증언되고 있으며, 성자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예수 세례 때의 삼위일체묘사(마르 1:9-11), 부활한 예수의 세례명령 속에 나타난 성삼형식(마태 28:13)과 다른 많은 삼위일체 정식(定式)들은 이러한 초기 교회신앙을 증언하고 있다(로마 1:3-5, 8:9-11, 2고린 13:13, 요한 14:26, 15:26).

   2. 삼위일체 교리 : 삼위일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신비(絶對神秘, mysterium absolutum)로서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인지될 수 없으며, 계시된 다음에도 이성(理性)에 의해 온전히 간파될 수 없다(DS. 3015, 3225). 그리스도 신앙에 절대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 신비이다. 왜 삼위일체가 이러한 가장 기본적 신비인지는 교리상으로 확정된 바 없으며, 왜 이 신비가 우리에게 중요한지, 또 어떠한 구원실재 안에 우리를 위해 소여되어 있는 지도 명시적 사유가 교리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한 하느님이 세 '위격'(位格, upostasis, persona, subsistentia)으로서 존재하는데(DS. 73, 75, 88, 112, 115, 152, 501, 525, 528-531, 800, 803, 351, 1330),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本性, phusis, natura)이고, 하나의 하느님 본질(本質, ousia, essentia)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實體, substantia)이다(DS. 73, 75, 88, 112, 115, 152, 150, 501, 525, 527이하, 800, 803이하, 1330이하, 1337, 1880).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DS. 44, 75, 125, 162-169, 188, 501, 526이하, 800, 851이하, 1330). 여기서 사용된 개념들의 교의적 정의는 내려진 바 없다.

   ② 그런데 이 위격들은 서로 구별된다(DS. 75, 531, 1330이하, 2828).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고(DS. 75. 189, 525, 800, 1330이하), 성자성부의 실체로부터, 오로지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DS. 44, 189이하, 76, 112, 125, 163, 525이하, 800, 804, 1330이하). 성령은 출산되지 않고(DS. 75, 527), 하나의 유일원리로서의 성부성자로부터 발출된다.(DS. 71, 189이하, 75, 150, 527, 800, 850, 1300, 1330). '출산'(出産, generatio)과 '기출'(氣出, spiratio)은 신성의 전달 내지는 파견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이 전달이 한편으로는 성부로부터 출산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성부성자로부터 기출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러나 '출산'과 '기출'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교리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

   ③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關係, relatio)가 있으며(DS. 531, 573, 800),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있다(DS. 73, 189, 973이하). 그런데 세 위격들이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동일하면서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 근거가 보다 선명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

   ④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DS. 529, 580, 1330),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사위일체(四位一體, Quaternitas)를 구성하지 않는다(DS. 534, 803이하).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relationis oppositio)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DS. 1330),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안에 존재하며(DS. 1331),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다(DS. 529, 680, 790, 851).

   ⑤ 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存在, esse)와 역사(役事, operatio)면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DS. 189, 112, 501, 800, 851), 외부를 지향해서 오로지 하나의 역사원리(役事原理)일 뿐이다(DS 501, 531, 800, 1330). 세 위격들의 역사의 동일성을 말하는 공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효능인(效能因, causa efficiens)이며(DS. 3814), 이 공리로 말미암아 오로지 로고스(말씀)만이 인간이 되었다는 육화 교리와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교리가 부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이 된 위격성부성령이 아닌 성자 위격이며, 세 위격들은 인간과 각기 고유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교리들로부터 파생되는 교리인, 성부로부터의 성자성령의 구세경륜적 '파견' 교리교도권에 의해서 거의 계발되어 있지 않다(DS. 527, 536, 1523). 요컨대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치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기점 : 삼위일체는 있을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지복(至福)의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교의신학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그리스도 교화한 유일신론자들처럼 생활하는 것같이 보인다. 삼위일체 교리를 대할 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며,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 신비가 왜 계시되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사변적 삼위일체 교리신자들로 하여금 이 신비에 대한 신심을 촉진하기보다는 소원감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사변적 고찰을 시도하는 전통적 입장과 대조적으로 역사(歷史)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행업(行業)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하여 이 신비구원신비로 제시하려는 현대 신학자들의 취지와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현대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기본입장이 요약 소개될 필요가 있다.

   ①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계발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심화된 이른바 '심리학적 삼위일체론'(心理學的 三位一體論, De Trinitate psychologica)은 사계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 삼위일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는 성서진리를 자신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모상이 원형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모상의 본질을 구명해서 원형이신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일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들의 구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비(類比)를 인간영혼(anima)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이 영혼의 세 가지 속성으로 파악되고, 이들이 삼위일체의 내재성을 특정하게 이해토록 하는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유비속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인 실재의 세 현실적 요소들로서의 위격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억이 성부에, 인식이 성자에, 사랑성령에 해당된다고 설명된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실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자립적 관계(自立的 關係)라고 규정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인간 정신생활의 성취 속에서 하나의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의 현존을 파악하는 유비를 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發出, processus)의 성격을 순수정신의 내재적 행위로 규정한다. 이 발출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의 두 기능, 인식(認識, cognitio)과 의지(意志, voluntas)가 하느님의 발출에 상응하는 유비로 등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안에서 말씀[知性]과 사랑[愛志]의 두 발출 이외에 다른 발출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의 성격을 지성과 의지의 성취양식을 분석하는 가운데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성의 발출이 유사성(類似性, similitudo)의 근거에 입각하여 발생하기에 출생(出生, generatio)이라고 규정한다. 출산자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발출은 유사성의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상대자에로 이끌리는 성향(inclinatio in rem volitam)에 입각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말씀을 산출하는 지성작용은 유사성의 산출과 같아서 '출생'이라고 지칭할 수 있고, 하느님에게서의 의지작용은 유사성의 출산행위가 아니라 성향적 발출행위이기에 '기출'로 표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구명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신학의 기본 통찰들은 학설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부연해서 해설한다고 볼 수 있다.

   ② 현대 신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역점을 두는 전통적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일방성이 지양되고,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이 강조되면서 인간과 조물 일반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행업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인간 역사로부터 분리된 신적 실재에 대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인간역사 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의 역사에 관한 실천적이고 생동적 사유가 된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양자택일적 입장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의 삼위일체론적 기점은 범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라너는 삼위일체를 구원신비로 이해하려는 취지로써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그는 구원이 하느님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 Gottes)인 은총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은총이 삼위일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당신을 자신 안에 폐쇄시키지 않고 외부로 건네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외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수취자(受取者)가 요청된다. 이 수취자가 바로 정신과 육신의 합일체인 인간이다. 라너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참으로 인간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존재론적 구조에 상응해서 초월적(정신)이고 역사적(육신) 양식으로 발생한다. 인간역사성에서 비롯하는 전 인류사는 하느님의 계시사(啓示史)와 구세사와 공존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하느님이 자기전달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면, 구체적 인간 역사가 바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현현이자 인간에 의한 수용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제공이 인간에 의해 전적으로 수용될 경우에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출현이 발생한다고 라너는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육화를 '행해진 진리'라고도 라너는 부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초월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다가온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수용하도록 하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성령의 고유성이 사랑(Liebe)이라는 통찰이 생겨난다. 또한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진리로 발생하는 한, 역사를 지니며 역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전달이 사랑으로 발생하는 한, 이는 절대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 안에서의 역사의 재현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역전시킬 수 없이 나타나는 구체적 역사로서의 역사와 완성된 최후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은 구별되면서 나름대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 분 하느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는 한, 그 분을 성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인간초월성을 주도하는 원리로 전달하는 한, 그 하느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은 역사 안에서 현현되는데 이 분이 곧 성부의 육화된 말씀, 성자라고 불린다."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세 측면이 동일시되거나 온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온전히 주어진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리고 말씀(진리)과 성령(사랑)의 두 파견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전달 속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소인(素因, Moment)들로 파악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초월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성자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는 이 이중 파견이 바로 하느님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성부가 자기전달을 통해서 당신을 전달하고, 다른 편으로는 '진술된 것'과 '수용된 것'과의 실질적인 구별을 이룩한다. 그리고 전달된 것이 '전달자'로서의 하느님과 '전달된 것'으로서의 하느님 사이에 실제적 구별을 지양하지 않는 한에서, 바로 하느님의 '본질'로 표시될 수 있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내재적 삼위일체가 인간의 충만으로서 전달됨으로써 구원이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라너성자성령파견과 발출을 하느님의 (내재적이고 구세경륜적) 자기 전달의 발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삼위일체 신학구원신비로 이해한 것이다.

   몰트만 역시 라너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를 정관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궁지에 처한 조물들의 자유를 위한 그리스도수난역사의 압축으로 보면서 십자가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한다. 아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죽음에로 건네지면서 죽음고통을 당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서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고통당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들의 양도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진술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성령으로서 버림받은 인간들에게 와서 새 생명의 가능성과 힘을 선사하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적 삼위일체 사건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의 현재적 성령 가운데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아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느님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그 속에 내포하고 있어서 역사역사라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죄와 죽음의 성격을 지니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느님의 역사인 삼위일체안에 통합된다는 통찰이 파생된다. 그래서 인간고난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고통이 아닌 고통이 없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기쁨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에게서 삼위일체가 고통에 찬 조물의 역사와 관련된 실재임이 적나라하게 기술되고 있다.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하느님과 조물 일반, 특히 자유로운 조물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로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하느님 이해뿐만 아니라 신앙쇄신 자체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창조 이래의 역사과정은 성령 안에서 부활성자를 통하여 조물, 특히 인간을 향하는 하느님 성부로부터의 구원역사이자, 성령에 의해 이끌린 인간과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인도되는 귀환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 경위는 신비로 머무르지만, 인간과 세계의 완성된 구원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완성된 역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삼위일체 신비내포하고 있다. (沈相泰)

   [참고문헌] J. Felderer, Dreifaltigkeit, in: LThK III, pp.543-560, Freiburg 1959 / M. Schmaus, Trinitat, in HthG II, pp. 697-714 Munchen 1963 / R.L. Richard, Holy Trinity, in: New Catholic Encyclopedia XIV, pp. 295-306, New York 1967 / K. Rahner, Trinitat, in SM IV, pp.1005-1021, Freiburg 1969 / R. Garrigou-Lagrange, De Deo trino et creatore. Commentarius in Summam Theologiae S. Thomae(I, 27-119), Turin 1951 / B. Lonergan, De Deo Trino, Rome 1961 / J.M. Dalma, De Deo uno et trino, Madrid 1964 / E.J. Fortman, The Triune God, London 1972 / J. Auer, Gott der Eine und Dreieine, Regensburg 1978/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 Gottes. Zur Gotteslehre, Munchen 1980 / R. Schulte, Die Vorbereitung der Trinitatsoffenbarung, in: Mysal II, pp.49-82, Einsiedelin 1967 / F.J. Schierse, Die neutestamentliche Trinitatsoffinbarung in 같은 책 pp.85-129 / L. Scheffczyk Lehramtliche Formulierungen und Dogmengeschichte der Trinitat, in: 같은 책 pp.146-217 / K. Rahner, Der dreifaltige Gott als transzendenter Urgrund der Heilsgeschichte in: 같은 책 pp.317-401 / M. Schmaus, Die psychologische Trinitatslehre des hl. Augustinus, Munster 1927 / K. Barth,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tr. by G.T. Thompson. Edinburgh 1960 / J.E. Sullivan, The Image of God. The Doctrine of St. Augustine and its influence, Dubuque 1963 / Y. Congar, Je crois en l'Esprit Saint I-III, Paris 1979-1980 / 요셉 라싱어 著, 장익 역, 그리스도 信仰 어제와 오늘, pp.122-146, 분도출판사, 왜관, 1974 / P. 네메셰기, 부산 까르멜수도원 옮김, 성부성자성령, 분도출판사, 왜관 1978 / 심상태, 三位一體論의 어제와 오늘, 司牧, 75호 (1981. 5), pp.81-91.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