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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인쇄

한자 長老敎
영어 Presbyterianism

   교회 정치제도로서는 장로(長老)들에 의한 교회의 정체(政體)를 지칭하는 말이다. 16세기 스위스계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이 교회제도가 설립될 때에는 사도적 전통의 계승과 그 개혁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신약성서 안에 있는 교회정치의 모델은 장로제도와 함께 감독 및 회중(會衆)제도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시인하고 있으며, 장로제도만이 신적인 제도라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장로교회 정치는 피라미드형의 교회 교권과 치리(治理)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당회(堂會) · 시찰회(視察會) · 노회(老會) · 대회(大會), 그리고 총회(總會)가 그것이다. 그런데 구미(歐美)의 교회에서는 시찰회가 없는 곳이 많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회가 없다. 총회는 각 노회를 대표하는, 대개 같은 수의 목사, 장로 총대(總代)로서 구성되는 교회 최고의 치리 기관이다. 이러한 여러 치리 기관들은 본래 교회원들의 선거에 의한 대의(代議)형태의 피라밋식 행정체제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신약성서장로(presbyters)와 오늘의 장로(elders)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 성격에 대한 이견이 많다. 어떤 이들은 이 양자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목사가 실질상의 장로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사도적 계승을 이 장로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수행하는 데 중요성을 두고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목사들은 한 교회의 공동의회(共同議會)에서 선거되어 초빙되지만, 목사의 안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총회에서 시행한다. 장로교 목사의 교육 수준은 전통적으로 높아서, 대개 4년제 대학을 마치고 3년의 신학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장로교로서 국교(國敎)를 삼은 나라는 스코틀랜드밖에 없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도 장로교회의 기본원리인 정신적 영적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또 실현하고 있다. 장로교의 신앙 표준은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교리문답≫(敎理問答) 및 신경(信經)이지만, 최고의 표준은 역시 하느님의 말씀, 성서에 두고 있다. 그리고 성서는 ‘정확무오’(正確無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의 교리는 근원적으로는 칼빈주의적이요, 예정론(豫定論)과 신의 영광에 핵심을 두고 있다. 예배는 간결하고 예식을 중요시하지 않으나, 위험을 차리고 있다. 물론 장로교에도 고교회(高敎會)와 저교회(低敎會)가 있어서 의식에 치중하는 곳도 있고, 또 이를 전혀 무시하는 곳도 있지만, 칼빈(J. Calvin, 1509∼1564)이나 녹스(J. Knox, 1513∼1572)의 원칙에 충실했을 때, 언제나 설교에 대한 강조, 사도 신경에 대한 충실을 그 특징으로 나타내게 된다. 장로교의 본래 전통에서 성찬 예식은 빈번히 지켜지도록 돼 있어서, 설교와 성찬으로 교회의 두 기둥을 삼고 있다. 당회에 의한 치리나 권징 역시 한 때 엄격하게 공식적으로 준행되었으나, 근래에는 그리 현저하게 지켜지지 않고, 다만 목사에게 그 권한이 대폭 이양된 느낌이다. 전 세계의 장로교회 연합체인 ‘세계개혁 장로교회 연맹’(The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holding Presbyterian System)은 1875년에 조직된 이래, 정기적으로 회집되고 있으며, 한국의 노정현(盧貞鉉) 장로가 1978년부터 그 부회장(副會長)을 1983년 현재까지 맡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실질상 1876년에 그 초석이 놓여졌다. 그 해 만주의 고려문(高麗門)에서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 선교사 매킨타이어(J. MacIntyre)에게서 이응찬(李應贊)이 세례를 받고, 곧 성서번역에 착수하였기 때문이다. 선교 역사는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安連, 1858∼1932)이 인천에 도착한 날로부터 기산한다. 그의 뒤를 이어 1885년 4월에 언더우드(H.G. Underwood, 1859∼1916)가 다시 착한(着韓)하여 선교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선교 확장이란 단계를 지나 장로교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소위 ‘네비우스 방법’이란 선교 원칙을 적용할 때부터의 일이다. 그것은 선교지에서의 이반적인 복음전파의 효율화를 노린 방법 이외에, 자립 선교, 자립 정책, 자립 수급의 세 원칙을 철저하게 실현함으로써 장로정치의 기본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해 나간 정책 결정이었다. 장로교의 이러한 자립적 주체적 신학의 정립과정은 그 때 다른 교파들과의 선교지역에 대한 교계예양(敎界禮讓, comity arrangement)이란 절차에서도 나타났다. 교계예양을 통해서 장로교는 대개 평안남북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 및 전라도의 대부분을 맡았지만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미 호주 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의 분담 형태였다. 이런 여러 장로교 선교부들의 협력과 협의를 위해서 1889년에는 ‘미국 북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아(호주) 미션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고, 1893년에는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서 장로교의 신경장로교회의 조직을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장로교가 독로회(獨老會) 형식으로 조직된 것은 평양신학교의 졸업생 7명이 안수를 받는 1907년 9월 17일을 기해서이다. 이 때 네 장로교 선교부은 한국에서 단일 장로교회 설립에 합의하여, 그 통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초대 독로회장에는 선교사 모페트(S.A. Moffett, 1864∼1939)가 선출되었다. 독로회 창립 당시의 교세는 선교사 32명, 한국인 목사 7명, 장로 33명, 학습교인이 2만 1,482명, 원입(願入)교인이 6만9,098명, 세례교인이 1만 7,890명이었다. 교회수는 1,022개소, 학교수는 402개교였다. 이 교회들이 1906년에 낸 헌금 총액은 9만 4,227원($47,113)이었다. 이 때 장로교회는 1905년부터 진행된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의 여파로 ‘1907년 평양(平壤)의 대부흥’이란 일대 전환기를 겪고 있었다. 강력한 투쟁적 · 구약적(舊約的) · 민주주의적 동력 동원체제로서의 교회를 비정치화(非政治化)해서 초월적인, 종교적 동기가 구조적으로 작용하는 교회로의 혁신운동이 실현된 것이 바로 이 평양 대부흥이었다. 그 여파는 감리교회를 비롯, 전국 교회 도처에 미치고 있었다.

   1912년에 이르러서 장로교회는 총회로 발족하게 되었다. 9월 1일 평양에서 창립된 총회에는 총대목사, 장로, 선교사 등 221명이 참석하였다. 이 때 언더우드가 총회장에 선출되고, 회계직(會計織職)의 블레어(W.N. Blair) 이외의 모든 임원직은 한국인 총대가 맡았다. 이 총회는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의 교회임을 과시하였다. 총회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내양(萊陽)에 선교사파견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실상 1909년 이미 한국 장로교회는 시베리아에 최관흘(崔寬屹)을 파송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교회는 계속해서 간도(間島), 몽고(蒙古), 멕시코 등지에 선교사파견하고, 인도의 기아(飢餓)에 막대한 구제헌금을 보낸 일도 있었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의료 선교와 학교 교육에서도 현저하게 공헌을 남겼다. 1885년 4월에 벌써 알렌은 서울에 고종(高宗)의 윤허로 광혜원(廣惠院)[뒤의 濟衆院, 世富蘭偲, 延世大學校醫科大學]을 설립한 일이 있고, 평양에 기홀(記-)병원, 부산 · 대구 · 여수의 나병원, 세브란스의 결핵병원 등을 설립하여 신체의 병고에서의 해방도 복음전파와 함께 수행해 나갔다. 더구나 경신학교(儆新學校, 1886년), 정신학교(貞信學校, 1887년), 숭실학교(崇實學校, 1897년)와 평양신학교(1901년)를 설립하여 교육에 정진하였다. 1909년 현재 장로교계 학교수는 605개교, 학생수 1만 4,708명에 이르고 있었다. 일제도 한국의 근대 교육의 시작이 장로교 · 감리교에 의해서 주도 된 사실을 그들 경무부장(警務部長) 회의(1910년)에서 공언한바 있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치하(1910∼1945년)에서 그 신앙의 보존과 민족적 동일성의 확보를 위해서, 때로는 민족 양심의 보루로서 괄목할 만한 흔적을 남겼다. ‘105인 사건’은 서북(西北)계의 장로교 박멸을 위한 일제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날조였고, 105인 실형자중 97명이 장로교인이요, 그 중 67명이 선천(宣川)과 정주(定州) 출신이었다. 이것은 장로교인이 지탱하여온 민족적 정기에 대한 일제의 박멸 자세였고 따라서 장로교회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배경을 설명하여 준다.

   3.1운동 때에도 그 피해 비율이 장로교의 경우가 훨씬 크게 눈에 띄었다. 총독부가 발표한 기소피고인의 종교별(宗敎別) 통계는 별표(別表)와 같았다.

   그런데 개신교의 2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1925년 현재의 교세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장로교 : 교회수(2,309), 목사수(315), 전도인수(779), 교인수(193,823), 주일학교수(4,663)

   감리교 : 교회수(1,140), 목사수(145), 전도인수(631), 교인수(45,166), 주일학교수(946)

   합계 : 교회수(3,449), 목사수(460), 전도인수(1,410), 교인수(261,580), 주일학교수(5,609)

   평균치를 내기는 어려우나 대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수적 비율은 크게 3대 1정도였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고, 이러한 장로교의 수적 우위가 한 때 장로교가 그 교권적 기능을 감리교에 대하여 행사한 것처럼 보이는 오해를 낳게도 하였고, 실상 1930년대 중반에는 피차간의 갈등이 없지 않았다. 가령 1932년 6월에 발족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이란 것이 그 구체적인 한 표현이었다. 감리교의 신흥우(申興雨)와 서울의 일부 장로교 목사들[咸台永, 權英湜, 全弼渟 등]이 동조하였던 이 토착적 민족교회 지향의 한 종파운동이 서북의 장로대세와 그 교권기능에 도전한 하나의 반발운동이었다. 실상 이 때까지 장로교회 안에도 대구(大邱)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 봉산(鳳山) 김장호(金壯鎬)의 기독교회, 차학연(車學淵)의 자유교회와 같은 종파운동이 있었다.

   교회는 1920년대부터 사회사조의 변화나 농촌의 몰락이란 현실에 직면하여, 사회 개혁사회운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총회 안에 농촌부를 상치(常置)한다든가, 전국적인 규모의 농사강습소를 사경반(査經班)이란 전통적인 교회훈련 채널을 통하여 수행하며, 소작인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협동조합 운동도 진행하였다. 더구나 일제의 민족도덕 해체작용, 곧 유곽이나 아편 판매, 주초(酒草) 소비에 대하여 절제(節制)운동 차원 이상의 사회정의 운동을 수행하였고, 1936년에는 ‘연소자 금주금연법’을 칙령으로 발효케 하는 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각해져서 교회관계 여러 운동이 피검(被檢) 시찰되고, 1938년에는 총회에서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 89명의 임석 아래 신사참배를 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총대의 항의도 있었지만 결국 신사참배를 신민(臣民)으로서의 적성(赤誠)으로 한다고, 모멸의 결의를 해야만 하였다. 이때부터 교회신성(神聖)은 위협받았다. 도처에서 전향의 성명이 발표되고, 교회당은 가마니 공장, 심지어 헌병 파견대로 징발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마지막 추방된 것은 1942년 6월의 일이었다. 선교자들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이외에도 많았다. 더러는 광복 이후에 출감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은 한국 교회의 양심으로 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

   광복이 되고 나서 교회는 재건과 부흥에 힘썼다. 하지만 일제치하 때의 전향의 문제, 신앙 보수의 문제가 엇섞여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장로교도 1951년 고려파 장로교와 예수장로교의 분립이 있었고, 뒤이어 신학 방법론의 문제 때문에 역시 1953년 근대주의와 에큐메니즘 표방의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장로회의 분립, 그리고 W.C.C의 문제로 용공(容共)시비 때문에 통합(統合) 예수장로회와 합동(合同) 예장과의 분립이 1959년에 진행되었다. 그래서 1980년 현재 장로교 수는 29교단이고, 교인수는 대개 400만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1978년부터 이 여러 장로교의 재일치를 위한 협의회 내지 연맹 형식의 접근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기운은 1983년 미국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와의 일치에 자극받아 더 진지하게 추진되고 있다. (⇒) 프로테스탄티즘 (閔庚培)

   [참고문헌] J. Moffett, The Presbyterian Church, 1928 / J.N. Ogilvie, The Presbyterian Churches, 1925 / E.W. Smith, The Creeds of Presbyterians, 1901 /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改訂版, 1982 / 白樂濬, 韓國改新敎史, 1974 / 張喜恨, 韓國長老敎會史, 1970 / 朝鮮예수敎長老會 總會錄, 1912∼1983 / 各老會錄, 朝鮮예수敎聯合公議會錄, 1982∼1936 /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上, 1928; 下, 1968.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