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사전

검색
※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전도서◆ 인쇄

한자 傳道書
라틴어 Liber Ecclesiastes
영어 Book of Ecclesiastes

   전도서는 성서 중심사상의 발전과정에서 새로운 단계를 제시해 주는 작품이다. 개별적인 상선벌악(賞善罰惡)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나 전통적인 교의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선 욥기와 유사한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점도 보이고 있다. 욥기고통이 필연적인 죄의 결과가 아니며 죄의 탓과 아무런 상관없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렇다면 덕행에 대한 참된 대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아 제시해 주고자 하는 것이 전도서의 주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1. 저자와 저작연대 : 구약성서 46권 중의 한 권인 전도서(傳道書)가 히브리어 성서에는 코헬렛(Qohelet)이라는 서명(書名)으로 나타난다. 코헬렛은 ‘집회’를 의미하는 카할(qahal)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집회에서 말하는 사람’ 즉 사회자나 설교자를 가리킨다. 그리스어 성서번역자들 역시 ‘집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파생된 에클레시아스테스(ekklesiastes, 설교자)를 본 작품의 서명으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코헬렛이든 에클레시아스테스든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전도서 1:1절은 코헬렛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밖에 1-2장 안에서 솔로몬왕의 삶을 암시해 주는 대목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작품이 유태교 랍비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비교적 후기의 히브리어로 저술되어 있고 아랍어적인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나 전통교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유배시대 이후에 기초된 것으로 본다. 또한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필사된 전도서 두 개의 단편이 쿰란 제4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최소한 마카베오시대 이전에 본 작품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그 저작연대를 대략 기원전 3세기로 추측하고 있다. 본질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저자는 그 작품구성에 있어서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저자가 살던 시대는 그리스제국시대(333∼367년)였으며, 당시 팔레스티나이집트의 프톨레메오 왕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이집트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무튼 당시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리스의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비록 사물을 보는 방법은 히브리적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벌써 그리스사상을 다분히 풍기고 있다.

   2. 구조와 내용 : 전도서를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문맥이 끊긴다거나 주제가 갑자기 바뀌는 사정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본 작품에 여러 저자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보는 성서주석가들도 있으나, 비교적 후기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 끝말 부분 12:9-14절을 제외한다면 작품의 단일성을 단언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작품 속에서 풀기 어렵게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선임자들의 견해를 논박하기 위해서 그들이 작품을 자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주기적 변화를 노래한 머리말(1:3-11) 다음에, 본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제1부라고 볼 수 있는 1:12-2:26절이 뒤따라 나온다. 여기서 설교자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자기반성을 하게 한다. 아가(雅歌)가 솔로몬의 영화(榮華), 업적 그리고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반면, 전도서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폭로하고 있다. 향락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고 설교자는 말한다.

   제2부(3:1-6:12)에서 설교자는 영원성과 순간성을 비교해 나가면서 각개 인간은 부정적인 면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실재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현자(賢者)는 상대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운명의 신비 앞에서 철학적인 고뇌를 표명한다(3:22, 6:12). 인간의 삶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1:3, 2:22, 3:9, 5:15) 인간은 자기존재의 모순성을 피할 수 있는가? 좌절에 대한 혐오감만이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설교자는 결국 자살과 쾌락욕 중에서 인간다운 참된 행위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제3부(7:1-12:7)는 제2부의 첫머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교법을 사용하여 좋은 일들이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저자는 지혜론을 펴 나가면서 정의, 여인, 권력행사, 운명의 비밀, 부패하고 비참한 세계 안에서의 사회현실 등과 자신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욥기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설교자 역시 현자들의 형식주의와 내용이 텅빈 화법을 공박하기도 한다. “사람이 어리석으면 말이 많아진다”(10:14). 끝말 또는 부록으로 볼 수 있는 12:9-14절은 후기에 첨가된 부분으로 보이며, 본서의 출처와 권위에 대하여 유태인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다섯 전례 두루마리(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델) 중의 하나로서 예나 지금이나 유태교 회당에서 초막절 제3일에 낭독되고 있다.

   3. 메시지 ① 인생관 : 설교자의 정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를 염세주의자, 쾌락주의자, 회의주의자로 보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다양한 견해는 그 나름대로 이를 입증할 만한 문구를 작품 속에서 찾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어느 것도 저자의 정신을 완벽하게 밝혀 주지는 못한다. 설교자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의 실질적인 섭리에 대해 자신의 신앙고백하는 종교인이다(3:11 · 14-15, 8:17, 11:5). 쾌락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삶의 기쁨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며(2:24, 3:13, 5:18, 9:7), 오히려 쾌락에 대한 남용을 단죄하고 있다(2:1-2, 11:8.10). 또한 설교자가 회의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자신 회의론자는 아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6:10, 12:7). 따라서 우리는 그를 현실주의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삶을 하느님의 선물 즉 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이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자 하는 참된 인생관이다.

   ② 하느님섭리 : 설교자는 전통신학이 주장하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기계적인 개념을 배척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갚아야 할 것[借邊]과 가지고 있는 것[貸邊]을 엄격하게 대조해서 계산해 주는 회계사가 아니다. 덕행과 범죄에 비례해서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의무적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거래자가 아니다. 저자는 몇몇 현자들의 순박한 낙관적 정신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상을 부정한다.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알 사람은 없다. 이런 일을 안다고 장담할 현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도 8:17). 여기까지를 욥기의 결론으로 본다면 전도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지상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천명하면서, 인간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모든 것을 온통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이 잘 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 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7:14). (金建泰)

   [참고문헌] A. Barucq, Ecclsiaste, coll. Verbum Salutis Ancien Testament 3, Beauchesne, Paris 1967 / H. Cazelles, Introduction critique l'Ancien Testament, Desclee, Paris 1973.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