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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인쇄

한자 舊約聖書
라틴어 Vetus Testamentum
영어 Old Testament

   옛 계약의 내용을 언어의 다양한 형식을 빌어와 적어 놓은 거룩한 책이다. 여느 책과는 달리 이 책이 종교의 경전인 이상 구약성경(舊約聖經)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외적으로 보아 성서는 그 시대와 저자들이 매우 다양한 책들의 대전집(大全集)으로 나타난다. 이 전집의 가장 오래된 본문과 마지막으로 씌어진 본문들 사이에는 거의 천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집을 ‘책들’(ta biblia)이라 이름하였으니, 이 말이 현대어 ‘성서’(Holy Bible)의 어원이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거룩한 책들’을 또 다시 두 개의 전집으로 분류하고 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이다. 옛약속, 새약속의 낱말에서 약속이란 표현은 고대 라틴어 역본을 지칭하던 ‘테스타멘툼’(Testamentum, 遺言)에서 유래했으니, 당대의 그 라틴어휘는 ‘인간들과 맺은 하느님의 계약’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성서는 ‘옛계약의 책들’과 ‘새계약의 책들’로 각기 나누어 이름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아직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다이즘의 입장과는 달리 구약성서를 주님 예수의 등불 아래서 읽고 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신비를 예언하였으니, 그 책의 변형(變形)의 결과로 신약성서세상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는 이는 성서를 읽을 때, 두 계약의 밀접한 관련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옛 계약의 책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들을 글로 적고 있다. 하느님은 제일 먼저 이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켰고, 이스라엘을 사나이계약의 파트너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啓示)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선물하심으로써 그들의 역사인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역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일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백성의 유일한 역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그 뿌리를 찾을 길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고도 험난한 이 역사를 통해 그들의 하느님으로부터 한 분의 구세주, 곧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후 1세기 초엽이 되자 상당수의 유대인들과 또 점차로 그 숫자가 불어나던 이방인들이 ‘나자렛의 예수’라 불리던 그 인물을 메시아로 인정하였다. 그들이 히브리어의 ‘메시아’와 동일한 뜻을 지닌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예수께 붙였다. 또 그들은 예수의 역사적인 개입, 특히 그분의 죽음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온 인류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들을 모은 책들이 ‘새로운 계약’ 곧 ‘신약성서‘의 전집으로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독자들이 성서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발전하게 되는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활동하시는 분’이다, 그 분이 말씀하시면 천지가 개벽되고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행동을 하게 되고 또 사건들이 발생한다. 하느님은 목청을 돋우어 아브라함모세, 판관들과 예언자들과 말을 건네고 있다. 그분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이사 45:1)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도 말씀하시기를 꺼리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인간의 언어를 통해 그 꼴을 갖추었으니, 친히 선택한 사자(使者)들을 시켜 이스라엘 사람과 세세대대의 전 인류에게 오늘도 말씀하시고 있다. 신약성서의 어떤 본문들(요한복음, 히브리서)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가장 탁월한 말씀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말씀 곧 언어는 하느님과 인간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는 도구(道具)요, 그 둘의 욕망을 표현하는 매체이다. 말이란 누가 쓰고 나면 또다시 사전(事典) 속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그 무엇이 아니다. ‘누가 말한다’는 것은 그 화자(話者)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요, 반드시 모종의 실행(實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말씀이 진리의 빛(요한 1:9)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전하고자 했던 모든 말씀은 나자렛 예수라는 그 ‘유일하신 분’ 안에 집약되어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말씀의 증인(證人)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들 중의 상당수가 필명(筆名)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라성 같은 그 작가들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인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고 밝히 비추며 또 인간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적 메시지의 정확한 번역은 교회의 가장 중대한 사업이다. 번역가는 원전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훼손해서도 안 되고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일 수 있는 그 ‘의미의 효과’를 놓쳐서도 안 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데 이 첫 문집은 고대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써서 남긴 여러 책들 중에서 골라 묶어 놓은 선집(選集)이란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민수 21:14, 여호 10:13, 역대 29:29 참조). 시중에 나돌던 여러 책들 중에서 “이 책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확정하는 것을 정경(正經, canon)의 고정이라고 부른다. 구약정경의 첫 선정(選定)은 에즈라시대(기원전 5세기 후반경)에 와서 처음으로 있었다. 정경의 목록을 고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종교의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또 교회들의 만장일치로 이러저러한 책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결정하면, 그 책들이 향후 신자들의 믿음과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즈라시대의 정경목록은 성서의 첫 다섯 권의 책을 율법(Torah, 느헤 8장 참조)의 제하에 묶었다. 다음 시대에 와서 성서의 예언서들이 ‘예언자들의 문집’이란 제하에 정경목록 속으로 들어왔다. 유다이즘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해설과 연장(延長)이란 관점하에 예언서들을 선정하였다. 예수의 시대에 이르러 누가 ‘성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문집(文集)’을 지적하였다(마태 5:17, 7:12 …등). 또 그 다음에, 정경의 목록 안에 들어온 책은 시편집이었다(루가 24:44). 시편들이 예루살렘성전과 유대교의 회당들에서 ‘공식기도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중에 나돌던 상당수의 책들이 과연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위 율법학자로 통하던 사람들이 기원후 90년경 팔레스티나의 얌니아(Jamnia)란 곳에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당시의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유태교 신도들을 위하여 성서경전목록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이 정경은 성서의 서책들을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항목은 ‘율법’과 ‘예언자들’ 그리고 ‘그 외의 문집들’이었다. 이 문집은 150편의 시편들만 포함하고 있었다. 얌니아의 정경은 모두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다만 몇 구절만이 히브리어의 사촌뻘인 아람어로 쓰여졌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유태인들이 그리스 문화권 속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3세기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시(市)에 이민하여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그리고 몇 권의 다른 책들을 당시의 국제어인 그리스말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꼈다.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간 교포들의 제2세가 모국어를 읽지 못하게 된 것처럼 당대의 유태인 후손들도 조상들의 말인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생긴 성서의 그리스역본을 ‘칠십인역 성서’(Septuaginta)라고 부른다. 70인역본은 얌니아의 정경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토비트서와 벤시라의 집회서를 정경으로 취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역본은 직접 그리스말로 저술한 마카베오 하권과 솔로몬의 지혜서도 수록하고 있다. 또 이 역본은 그리스 문화권 안에 살고 있던 첫 수세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예의 역본을 읽었고 또 그들의 글에 인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유다이즘의 경우에 얌니아의 히브리어 정경만이 성서로 통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얌니아의 히브리 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가톨릭 교회기원후 4세기(그러니까 382년의 로마 주교회의)에 성서의 정경목록을 공식적으로 고정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는 382년 로마 주교회의(Synodus)가 확정한 정경을 재차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정경에는 소위 제2경전(Deuterocanonicus)으로 통하던 성서의 그리스어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은 제2경전을 성서로 인정하지 아니했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서역본에서 소위 위경(僞經)이란 항목 하에 수록하고 있었다. 위경에 관하여 로셀(La Rochelle)의 신앙고백은 “이 책들이 아직 유익하지만 이 책들은 근거로 신앙의 조항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들은 제2경전의 성서권위에 관하여 한 번도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없었다. 정경에 관하여 이 같은 엇갈린 입장을 개선한 것은 교회일치운동의 덕분이었다. 1968년에 세계성서공회와 로마교회의 일치사무국은 획기적인 협정을 체결, 제2경전을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에 수록하도록 합의하였다. 따라서 대한 성서공회가 공동번역에서 ‘가톨릭용’과 ‘개신교용’을 분리시킨 것은 분명히 교회일치운동에 역행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편협한 분리주의(分離主義)의 소산이며 그 말씀에 언론통제를 가하는 것이다. 또 공동번역의 정경목록은 제2경전을 ‘그외의 문집’이란 항목하에 수록하고 있다.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에스델서의 경우이다. 그리스어로 씌어진 에스델서의 제2경전 부분이 히브리어로 씌어진 원전과 너무나도 정교하게 섞여 있어서 그 자체로 일관성 있는 의미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여 공동번역의 편집자들은 에스델서를 두 가지 책으로 분리시켜 번역하였다. 그 첫 권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에스델서요, 다음의 책은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에스델서였다. 후자는 제 2경전의 목록 안에 수록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제2경전을 격하시키는 일 없이 성서로 받아들인 것이다. 단지 세계의 공동번역은 히브리 성서의 분류원칙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수된 그 분류 항목은 ‘오경’(Pentateuque), ‘예언서들’(Livres prophetiques), ‘그 외의 문집들’(Autres Ecrits)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성서의 역본들은 성서를 ‘오경’, ‘역사서들’, ‘시서(詩書)들’ 그리고 ‘예언서들’로 분류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분류원칙에 익숙하였다. 하지만 공동번역의 분류원칙은 성서의 히브리어 원전의 분류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또 히브리 성서의 분류순서는 어떤 의미로 성서의 여러 서책들의 문학유형을 존중하고 있다. 가령 여호수아서판관기(判官記) 혹은 열왕기(列王記) 들이 단순히 ‘역사서’라는 관점에서 읽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역사적 의미’를 밝혀 주는 ‘예언자적 메시지’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유태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마호메트의 이슬람교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약성서의 내력을 ‘책의 사건’이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서구의 문예부흥 이후에 역사비평적 방법론에 입각한 성서 연구의 실적은 실로 눈부시고 방대하다. 문제는 한국의 성서독자들이 성서의 본문은 읽지 않고 오히려 400년 동안 누적된 성서에 대한 그 연구문헌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적 방법론들은 성서를 읽는 데 필요한 한갓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성서에 관한 책들을 읽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말씀성서 그 자체를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교개종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외침은 “성서를 집어 들고 읽어라”(tollo et lege!)하는 것이었다. 성서의 본문을 읽고 또 읽어 하느님의 말씀에 익숙해진 사람만이 그 책의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성서 봉독에 필요한 학문적인 방법론과 그 연구 결과만을 읽는 것은 마치 어느 어머니가 아기를 목욕시킨 뒤에 그 물이 더럽다고 해서 10층 높이의 아파트 안방에서 아기가 들어 있는 채로 목욕물을 창밖으로 쏟아 버리는 것과도 같다.

   현대의 언어과학적(言語科學的) 성서연구는 사학(史學)에 입각한 성서 연구의 방법론의 그 한계점을 시정하려고 한다. 성서본문의 통시성(通時性)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 기원에 가두어 버리려고 하는 고고학(考古學)적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씀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역사성도 함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언어학이 강조하는 바대로, 성서본문의 공시성(共時性)은 하느님 말씀의 ‘예언자적 성격’을 부각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주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다(묵시 1:6).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 분이 하신 말씀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 성서의 보통 독자들이 먼저 생명의 그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읽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야고 1:21 이하 참조). (徐仁錫)

   [참고문헌] 徐仁錫 著, 오늘의 구약성서연구, 성바오로 출판사 1983 / E. 까베냑 · P. 그럴로 · J. 브리앙 著, 徐仁錫 譯, 성서역사적 배경, 성바오로 출판사 1981 / 徐仁錫 著, 성서와 언어과학, 성바오로 출판사, 1983 / B.W 엔더슨 著, 제석봉 · 이성배 譯, 구약성서의 이해 I, II, III, 성바오로 출판사. 1983 / 徐仁錫, 하느님의 백성과 성서의 탄생, 展望 14號 / A. Weiser,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1961 / J. Schildenberger, Literarische Arten der Geschichtsschreibung im Alten Testament, 1984 / P. Humbert, Rescherches sur les Sources egyptiennes de la litterature Sapientiale d' Israel, 1929 / A. Neher, L'essence du Prophetisme, 1955.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