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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 인쇄

한자 ∼會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영어 Franciscan Order(O.F.M)
[관련단어] 글라라회 

   약칭 O.F.M. 1223년 9월 27일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랐으나,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무너져 가는 주님성전을 고쳐라”는 계시를 받고, 모든 재산을 버린 뒤 거룩한 복음에 따라 1206년부터 기도보속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모범적인 수도생활을 따르려는 형제자매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자 결국 공동생활이 필요하게 되어 1209년 4월 16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간단한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기에 이르렀다.

   1. 초기에는 프란치스코 자신이 살아 있는 규범이었으나 수도자가 많아지고 경험이 쌓임에 따라 새 회칙이 요청되어 1223년 11월 29일에는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대칙서(Regula fullata)에 의해 회칙이 인준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는 <작은 형제회회칙>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릴 만큼 철저히 가난겸손의 길을 걸었으므로, 다른 수도회와는 달리 명칭도 겸손하게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에게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 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겸손의 뿌리이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성인과 작은 형제들은 ‘평화의 사도’로 불렸고, ‘평화의 기도’는 프란치스코 성인기도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정신이 함축된 기도이다. 그 정신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이웃과 더불어 복음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걸식을 통해 생활한다는 그의 청빈(淸貧)정신은 프란치스코 성인세상을 떠난 뒤부터 수도회 내부에서 엇갈린 두 의견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에 이르러 프란치스코회 내에는 세 수도회가 분립(分立)되었는데, ① ‘작은 형제회’는 원시 회칙파(Observant)에서 발달한 수도회로 공동재산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② 1517년에 독립한 ‘꼰벤투알회’(O.F.M. Con.)는 공동재산의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③ 1528년에 독립한 ‘카푸친회’(O.F.M. Cap.)는 철저한 가난과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 세 갈레의 수도회가 프란치스코회의 제1회이다. 프란치스코회는 성인영성을 완성시켜 제2의 창설자로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of Bagnorea)를 비롯하여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같은 훌륭한 신학자와 대중적 사랑을 받은 성 안토니오(St. Anthonius of Padua) 등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 수도회의 활동상황을 보면 유럽, 아메리카의 전지역은 물론, 인도, 필리핀, 일본, 중국 등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도 수많은 형제들이 하늘나라를 증거하고 있으며, 100개 관구에 2만7,000명의 가족이 세계에 퍼져 있다(1983년 현재). 주로 가난한 자와 소외당한 이를 위해 봉사하는 이 수도회교육사업은 물론, 구라사업, 양로원, 고아시설 등에 힘쓰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서연구 신학교도 운영하며, 성지 예루살렘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속관구(屬管區)가 있어 현재 한국 형제도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 제2회 :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는 글라라 관상 수녀회(Poor Clare Nuns)이다. 성녀 글라라(1194∼1253)가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121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 창립한 수녀회로, 글라라 동정수녀회라고도 한다. 각 수녀원은 독립적이고 중앙집권이 아니기 때문에 총장직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성녀 글라라의 생존 중에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서 자매 수녀원들이 창설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르는 글라라 수녀원의 엄격성은 수녀원 가운데 가장 철저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글라라 수녀원 지원에서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수녀원을 위하여 가난회칙으로부터 면제를 얻어 공동재산의 소유가 허락되었다. 반면 아시시의 다미아노 수녀원과 피렌체의 수녀원 등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서 ‘가난의 특권’을 받음으로써 원시회칙(原始會則)의 전통을 지켰다.

   3. 제3회 : 성 프란치스코는 직접 그를 따르며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수도자들의 지도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 속에서 그의 뒤를 따르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프란치스코 제3회’를 만들고, 이 재속(在俗)형제들의 제3회를 ‘보속의 회’라고 불렀다. 완덕(完德)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큰 가정을 이룬 것이다. 제3회가 시작된 것은 1221년부터였다.

   한국진출 :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7년 9월 캐나다요셉 관구의 드콰이어(J. Dequire, 요한)와 벨레로즈(M. Dellerose) 신부가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이다. 이들은 대전에 수도원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9월 30일부터 대전에서 거주하였다. 1938년 8월 피에르(Pierre) 신부가 입국하여 가족은 3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원을 건립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선교사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신부캐나다로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강점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 · 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땅을 떠났던 벨레로즈 신부가 1955년 8월 한국에 다시 돌아와 폐허가 된 수도원 복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해 12월에는 이탈리아 제노바 관구 소속인 콘스탄치오(COnstancio) 신부가 와서 경남 진주(晋州) 지방의 전교에 나섰고, 1956년 2월에 또 다른 두 신부가 입국하여 콘스탄치오 신부를 도왔다. 8월에는 캐나다에 유학중인 방인 사제 안선호 신부가 대전 목동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박 루이스 신부캐나다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한국인 백 안젤로 신부가 귀국하고, 일본에 있던 한국인 전 안드레아 신부도 귀국하였다. 그래서 195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대전과 진주를 중심으로 작은 형제들의 활동은 괄목할 만큼 활기를 띠었다.

   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泗川), 의령(宜寧) 등 하동(河東) 지방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千浦)에도 본당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신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여평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恭) 안드레아 신부가 1959년 1월 목동본당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노기남 주교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을 맡았다. 1960년 진주 지방에서는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혜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이 있었다. 한편 성심원의 원장 정(鄭) 시온 신부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대리(지부장)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貞洞)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명도원(明道院)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

   1969년 10월에는 총장대리 관리 지역이던 한국 프란치스코회가 한국관구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아폴리나리스 신부가 선출되었다. 1971년 7월에는 성북동에 ‘평화의 모후 신학원’이 낙성되었으며, 1979년에는 새로 번역된 ≪성무일도서≫ 독서집 4권이 출간되었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는 현재 8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성대서원자는 39명이고, 유기서원자는 10명, 수련자 5명, 지원자 26명이다. 또 외국인은 총 16명이며 내국인은 64명이다.

   현재 이 회가 맡고 있는 직접 선교의 본당은 8개(1개 준본당 포함) 본당이다. 이곳에서 9명의 성직자와 6명의 평신도 형제들이 일하고 있다. 과거 이 회에서는 16개의 본당을 관할한 적도 있었으나 8개의 본당교구에 이양하였다. 이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사회에 평화를 심고, 사회사업과 특수사목에 치중하는 신앙에서 온 결과였다.

   한편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在俗兄弟會, 제3회)는 1962년 1월 대흥동성당에서 다시 출발하였다. 2월에는 ‘서울 형제회’가 심의회를 구성하고 회원교육과 사도직활동을 전개하여 회원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1963년 9월 17일에는 전국총회를 개최할 만큼 급속한 발전상을 보였다. 이로써 전국 각지에 산재한 단위 형제회를 지도육성하는 데 통일을 기하게 되었고, 초대 전국회장에 장면(張勉, 요한) 박사, 부회장에 노창원, 서기에 손광모, 회계에 차순각 형제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3회인 재속 형제회의 태동은 1937년 12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동(현 혜화동)본당의 주임신부인 오기선(요셉) 신부의 주선과 장면(요한) 박사, 장발(張勃, 루도비코), 서 헬레나 형제 등의 협력으로 명동, 백동, 약현, 영등포 등의 4개 본당 유지 20여명이 착복식(입회식)을 갖고 한국 최초의 준비 형제회가 탄생된 것이다. 1939년 1월 3일 1년간의 수련을 마친 20명의 회원들은 서약식을 마치고, 라리보 주교의 인가를 받아 서울 형제회는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날 첫 서약식에 이어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를 비롯하여 우재봉(요셉) 등 중견 지성인 수십명을 대상으로 제2차 착복식이 거행되어 희망에 찬 발전상을 보였다. 그러나 재속형제회는 발족한지 불과 2년 후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뒤부터 1962년까지 20여년간 정치적 배경과 시대적인 영향으로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거듭하였다.

   그런 역정에서 1939년 12월말 200여명의 회원으로부터 1941년말에는 400명으로 증가하였고, 1961년에 대전(목동), 인천, 부산, 김제에 본회가 조직된 뒤, 1962년 대전 대흥동, 부여, 대구에 1963년에는 합덕, 이리에 본회가 설립되는 등 계속 조직이 확장되어 1980년 현재 전국 11개 교구에 45개 형제회와 4천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형제회원들 대부분은 각자 소속 본당에서, 그리고 신심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체험한 영성생활을 교회 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서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또는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 글라라회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