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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인쇄

한자 迫害
라틴어 persecutio
영어 persecution

   강제력과 심리적 수단으로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탄압행위를 말한다. 박해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할 때도 있고, 정부의 묵인 아래 군중을 선동하여 탄압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 목적은 신자배교(背敎)시키고, 신앙 자체를 말살하려는 데 있다. 박해는 구약시대에 유태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혹독한 시달림을 받은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초기교회시대에 로마제국에서 10차례의 가혹한 박해를 비롯하여 16세기에는 왕권(王權)을 신장하려는 유럽의 군주들에 의해 많은 시련을 겪었고, 프랑스혁명 후 나폴레옹에 의해서도 큰 곤욕을 치렀다.

   아시아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뒤, 중국 · 일본 · 한국에서도 모진 박해를 겪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여, 신앙 자체를 말살하려는 공산주의 정책 때문에, 특히 8.15 광복 후 북한에서 철저한 박해를 당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침묵의 교회’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도 교회를 창설한 예수 그리스도이교도들이 무조건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박해를 예언하였다(요한 15:20).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그의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본능적으로 증오하고 박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베드로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에는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만 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극복한 신앙의 힘이야말로 오늘의 그리스도교를 확립한 기초였다. 그러므로 박해의 역사로마제국에서의 수난으로부터 기록되어야 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사는 그리스도교의 말살을 꾀한 폭군 네로시대(재위 : 54~68년)로부터 신앙이 공인된 밀라노칙령(勅令)까지의 3세기 동안을 말한다.

   1. 로마제국그리스도교 박해 : 로마제국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한 원인은 그들의 종교인 다신교(多神敎)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극(相剋)의 관계에서 온 것이다. 다신교는 로마제국의 국체에 잘 융합되는 종교였으나 일신교(一神敎)인 그리스도교와는 결코 타협이 될 수 없었다. 공화정(共和政) 말기부터 로마에는 국수적(國粹的)인 신에 대한 경배뿐만 아니라 이국(異國)의 신을 믿는 종교들이 들어왔다. 황제들은 전통적인 옛날의 신을 믿도록 힘썼다. 그러면서도 외국의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태도로, ‘찾아온 신’(di adventicii)으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신을 경배하는 것을 전제로 신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유태교그리스도교는 일신교인 까닭에 그 전제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하여는 ‘공인된 종교’(religio licita)로 일단 신앙을 허락하고, 종교조직도 묵인하였으나 전교에 대한 제약을 가하였고, 유태교가 널리 퍼질 우려가 생기자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그와는 달리 한 민족에 한정된 종교가 아니고, 포교활동도 다양하였으므로 교세는 착실하게 확장되어 갔다. 그래서 로마제국그리스도교를 차츰 꺼리게 되었다. 거기에 국가의 반대를 더 자극시킨 것은 민간의 여론이었다. 64년 7월 네로 황제시대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빈민지구를 폐허로 만들었을 때, 폭군을 증오한 대중은 네로가 건축사업을 벌이기 위해 근위병들에게 불을 놓게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위협을 느낀 네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소문을 막을 수 있는 속죄양(贖罪羊)을 찾게 되었다. 역사가인 타치투스(Tacitus)는 네로가 “대중의 미움을 사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서 속죄양을 찾아냈다”로 기술하였다.

   이 증오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다신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로마인들에게는 불손한 무신론자로 보였다. 그리스도 신자영성체를 하며 서로 ‘형제’요 ‘자매’하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근친상간의 불륜관계를 맺는 무리요, 인육을 먹는 족속이라고 비방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마침내 민중 사이에 홍수같이 무서운 재난의 화근으로 악선전이 되었다. 내로는 이것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가하였다.

   로마형법에 교정된 사형방식은 참수(斬首), 하층계급에게는 책형(磔刑), 분형(焚刑), 석형(石刑), 경기장에서는 맹수형(猛獸刑), 익살(溺殺) 등이 가해졌다. 또 하층계급에 대한 징벌로는 광산노동, 상류계급에게는 재산몰수와 직위해제, 공훈박탈 등으로 배교를 강요하고, 여자는 창가(娼家)로 보내졌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네로 때부터인데, 신성모독죄(神聖冒瀆罪)와 불경죄(不敬罪)로 신자는 당연히 처벌받는 대상이 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 98~117) 때에는 예수의 이름을 시인한 것만으로도 처벌에 가해졌다. 그리스도교 신자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확고하며 꺾일 줄 모르는 고집 때문에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면 누구나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사면이 되었다.

   그러나 조직적인 박해는 데치우스 황제(재위 : 250~251) 때부터 시작되었다. 법률에 의하여 모든 국민은 로마의 종교로 귀의하도록 의무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재위 : 284~305년) 때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의 잔인한 성격대로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고, 사형으로 생명을 잃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8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혹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자들의 독실한 신앙, 그것이 주위에 감명을 주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그리하여 피로 물든 로마제국의 토양 위에는 찬란한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도리어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교회 고유의 진리를 증거해 주었다.

   2. 조선조(朝鮮朝)의 천주교 박해 : 한국에서의 박해는 한국교회가 창설된 지 1년만인 1785년(乙未年) 3월(음)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中人)인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고문을 당하고 유배지(流配地)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 후 한국교회는 사대(四大)박해로 불리는 1801년의 신유(辛酉)박해,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 1846년의 병오(丙午)박해, 1866년의 병인(丙寅)박해를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박해로 신해(辛亥, 1791년), 을묘(乙卯, 1795년), 을해(乙亥, 1815년), 정해(丁亥, 1827년), 경신(庚申, 1860년)박해와 1901년 제주에서 민란(民亂)에 의해 피를 흘린 제주교난(濟州敎難) 등 잇단 수난으로 교회가 창설된 뒤 100여년 동안에 1만명에 헤아리는 순교자를 냈다.

   천주를 만유(萬有)위에 받들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천주교는, 과연 당시 국교(國敎)의 성격을 띤 유교사회의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천주교의 근대적 평등사상은 충효(忠孝)를 숭상하는 가부장적(家父長的) 봉건윤리와는 충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교(政敎)가 합일된 조선왕조의 유교사회에 있어서 종교는 사사(私事)일 수 없고, 어디까지나 국사(國事)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생활면(公生活面)에서 천주교유교간의 대립은 불가피하였고, 조선왕조의 정치 · 사회 · 가족 등 제도가 유교관습 · 제도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만큼 그 대립은 일층 심각한 문제였다.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정조(正祖)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이것이 이른바 ‘신해진산지변’(辛亥珍山之變)으로, 신자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을 당하여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살랐다 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어긴 죄목으로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충효를 절대적인 윤리로 여기는 유교의 봉건사회에서 양반가문의 일이고 보면 더구나 묵인될 수 없는 사회변혁적 대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내용에 관한 종교적 의미의 박해라기보다 유교윤리와의 충돌에서 오는 국가 이데올로기적 단죄(斷罪)였던 것이다. 즉 다른 사상과 종교를 모두 이단으로 보는 유교사상의 독재적 박해였다.

   1795년 을미년에 윤유일(尹有一) 등이 순교하고, 충청도 일대에 박해를 가하기는 했지만, 정조(正祖)는 성품이 온화하고 탕평책(蕩平策)을 견지하였으므로, 그의 치세에는 천주교에 큰 박해는 없었다. 그 시대의 박해는 주로 항상 노론벽파(老論僻派)가 남인시파(南人時波)를 꺼리고 질투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당쟁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경신년(庚申年, 1800년)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세는 일변하였다.

   정조의 뒤를 이은 것은 11세의 순조(純祖)였다.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金)씨가 섭정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순조 원년(1801년) 1월 11일(음) 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辛酉)박해이다. 그 결과 남인의 거두인 이가환(李家煥)과 권철신(權哲身)은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과 홍낙민(洪樂敏) 등은 순교하였으며, 이승훈(李承薰)이 처형되고, 정약전 · 약용(丁若銓 · 若鏞) 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세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잠적하였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3월 12일(음) 자현(自現)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姜完淑)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 신부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9월 29일(음)에는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어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그가 작성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가 탄로되어 큰 파란을 일으키고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外勢)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이 해 12월(음)에 대왕대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교의 원수라는 것을 신조화시키려 하였다. 이른바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는 이 포고문은 천주교와 교도에 대하여 “매국노, 불효, 안녕질서의 문란자, 방탕” 등 온갖 중상과 모략을 동원하여 박해의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신유박해는 약 100명의 순교자를 내는 한편 4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을 유배시켰다.

   1839년 헌종(憲宗) 5년에 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른바 ‘사학토치령(邪學討治領)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豊壤趙氏) 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안동 김씨의 관대한 정치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인 신부들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의 확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섭정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오라버니인 김유근(金逌根)이 중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자, 실권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업은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갔다.

   그 결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4월 12일(음) 남명혁(南明赫)과 궁녀 박희순(朴喜順)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7월 1일(음)에는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수원에서 자현하고, 주교의 권고로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모방(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래서 8월 14일(음) 3인의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이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에는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귀해일긔≫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여명이나 되었다. 기해박해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으나 규모가 광범했던 만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유식층의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퍼져나갔다.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에서 복음신앙으로 변해 간 것이 특징이었다. 교우들은 산간벽촌으로 모여 신앙의 이상촌을 이루는데 힘을 모았다.

   정하상은 순교에 앞서 호교문(護敎文)을 만들어 옥중에서 재상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에 전해지는 <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그는 이글에서 “옛 군자는 어떤 이단자라도 법으로 금하기 전에 반드시 그 뜻과 이치를 연구하였거늘, 어찌하여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그 기원과 전통을 조사도 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사도(邪道)로 규정하여 사형을 시키는 뜻이 어디에 있느냐”고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신랄히 비난하였다.

   헌종 12년(1846년)에 정부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김대건선교사들의 입국을 비교적 안전한 해로(海路)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登山鎭)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5일(음)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 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玄錫文) 등 남녀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고종(高宗) 3년(1866년) 대원군 치하에서 한국교회사상 최대의 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 박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南下政策)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초년에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고종 2년(1865년) 9월(음)에 러시아인들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왔고, 이어 승지(承旨)인 남종삼(南鐘三)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韓佛條約)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에 대하여 신앙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 인편을 보내어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달 뒤의 일이었다.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를 맞은 대원군의 태도는 너무나 냉담하였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얼마 전에 북경에서 조선사신이 보내온 서신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1860년 영불(英佛) 연합군에 의해서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청조(淸朝)의 위신은 물론, 한국의 고관들도 당황하여 피난 갈 궁리에 바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의 보복으로 중국 도처에서 양인살육(洋人殺戮)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여기에서 큰 힘이라도 얻은 듯, 천주교를 증오해온 보수적인 정부고관들은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교도들의 탄압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구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들고 나오자, 대원군은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들의 체포에 서명하였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불과 수개월 동안에 약 8천명에 달하는 교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게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생교회(自生敎會)의 전통을 지닌 한국교회는 하느님은총으로 불사조와 같은 신앙생명력에 의해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이루고, 후일 신앙자유의 날을 맞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숙원이던 교계제도(敎階制度)의 설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순교한 선인들 가운데서 거룩한 성덕(聖德)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 세계에서 공경을 받는 103위 성인영광을 안게 되었다.

   3. 8.15광복과 북한 ‘침묵의 교회’ : 그러나 1945년 8.15광복 후 북한 공산치하에서는 또 무서운 박해가 일어났다. 소련군에 의해 처음 수난을 당한 곳은 회령(會寧)본당이었다. 파렌코프(W. Farrenopf, 朴) 신부를 연행해 간 소련군은 8월 23일 아무런 이유없이 그를 총살했다. 그 뒤 소련군과 북한당국은 모든 교회에 노골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5월8일 밤부터 덕원(德源)교구의 사우어(Sauer, 辛) 주교와 수도원장 로트(Roth, 洪) 신부 등 4명의 성직자를 잡아서 평양으로 이송하고, 이틀 후인 5월 10일 밤에는 신학교 교장 로머(Romer, 盧) 신부를 비롯하여 독일신부수도자 전원과 한국인 신부 4명(金致鎬, 金宗洙, 金利植, 崔炳權)을 체포하여 평양 정치보위부로 보내어 가두는 한편 신학생과 수사들을 내쫒아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하였다. 또한 원산(元山) 성당의 구대준(具大俊) 신부와 원산수녀원, 신고산(新高山) 수녀원의 외국인 수녀 15명을 잡아 가두고 수녀원을 병원으로 만들었다. 5월 15일에는 함흥(咸興)수녀원의 독일수녀 5명도 체포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날로 심해지자 평양교구홍용호(洪龍浩) 주교는 남아있는 북한교구의 총책임자의 입장에서 김일성에게 항의를 제출하였는데, 그들은 도리어 1949년 5월 14일 홍 주교를 체포하고 잇따라 김필현(金必現), 최항준(崔恒俊) 신부도 잡아갔다. 그 해 12월부터는 박해가 더욱 심하여져 평양성당의 박용옥(朴-玉) 신부 등 4명의 성직자와 강계(江界) 성당의 석원섭(石元燮) 신부, 신의주(新義州) 성당의 홍건항(洪建恒) 신부, 영유(永柔) 성당의 홍도근(洪道根) 신부 등을 체포하고 성당을 폐쇄시켰다. 그래서 3,000여의 교우들이 남아 있던 평양에는 신부 한 명만이 있게 되었다. 정치 보위부에 잡혀간 신부 · 수사 · 수녀 들은 간첩이란 죄목으로 고문을 받은 후 강계와 만포진에 나누어 수용되었으며 일반 신자들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잡아 가두고 가산을 몰수당하게 되자 생지옥을 탈출하여 필사적으로 월남(越南)의 길을 찾게 되었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교회들은 더욱 심한 박해를 받았다. 6.25동란 전야(前夜)인 24일 밤, 평양교구의 조인국(趙仁國) 신부 등 5명의 성직자와 그밖에 7명의 신부들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북한에 남아있던 성직자는 거의 붙잡혀 갔으며, 남한에 침입한 공산군은 6월 27일 강원도 소양(昭陽)성당에서 아일랜드인 콜리어(Collier) 신부를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직자수녀들을 살해 또는 납치하고 성당을 강점, 그들의 침략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남북한을 통해서 그들에게 체포 학살된 성직자수녀, 신학생의 수는 150여명에 달한다.

   [참고문헌] 아우구스트 프란츤 著, 崔奭祐 譯, 敎會史, 분도출판사, 1982 /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