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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인쇄

한자 對話
영어 dialogue

   현대 세계의 특징이 ‘대화의 시대’라고 불려질 만큼 대화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그것은 과거에는 대화보다도 권위권력에 의한 하향적(下向的) 인간관계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인간 상호간의 존엄성과 동등성에 입각한 마음의 교류 없이는 원만한 인간관계나 공동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상호 간의 관계는 본래 대화적인 것이다. 인간은 본래 공동체로 창조되었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도록 태어났다. 인간은 다양한 모습으로 창조되어 서로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으면 일치와 평화를 누릴 수 없도록 창조되었다.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말은 ‘참다운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화의 근본개념과 상통한다. 그러나 오늘날 아직도 진정한 대화를 저해하는 요인들이 남아 있다.

   마르셀에 의하면, 현대인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너무도 피로하여 이웃을 수용하기보다는 거절하는 성향이 있고 물질만능주의로 인하여 인간존재적 관계(공동체성)을 망각하고 조건적 관계(이해관계)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지식을 나누거나 논쟁을 벌이는 일이 많아서 참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다. 참다운 대화는 서로의 인격을 나누는 것이다. 서로의 모든 ‘존재’를 나누는 것이 대화다. 더 나아가서 대화는 서로의 마음(spirit)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다양하게 창조되었고 각자의 체험 또한 다양하다. 따라서 대화는 인간으로서의 동질성을 나누는 동시에 이질성을 나누는 것이라야 한다. 요컨대 대화는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타인의 단점보다도 장점을 볼 줄 아는 마음의 자세가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것이 된다. 참다운 대화, 즉 교회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첫째, 대화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의 대화가 부정과 불의를 위한 대화일 경우 그것이 아무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대화라 할지라도 참다운 대화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음모이거나 작당에 지나지 않는다. 또 대화는 기쁨만이 아니라 아픔도 나누어야 한다는 점에서 센티멘털리즘(sentimentalism)에 빠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언제나 ‘참된 것’을 추구할 때 진정한 대화는 이루어진다. 둘째, 대화는 서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이 없는 대화는 서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이 없는 대화는 거짓말이거나 단순한 말의 교환에 불과하다.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웃고 대화한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 대화에 불과하다. 특히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한 상대방과 대화할 때 사랑의 정신이 꼭 필요하여 그 대화는 서로의 화해에 유익할 것이다. 셋째 대화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대화하는 사람끼리의 이익만을 위해서 대화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선익(善益)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 특히 상거래(商去來)에 있어서의 대화에서 공동선이 추구되지 않을 때 그것은 사회에 대해서 큰 해를 끼치게 된다.

   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자세가 요구된다. 첫째, 인간관계가 나쁠 경우 내가 먼저 대화하는 선행성(善行性)이 요구된다. 상대방이 말을 해 오면 나도 하겠다는 자세는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된다. 아집(我執)을 버리고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용기겸손이 절대로 필요하다. 둘째, 대화는 마음의 개방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의 마음을 굳게 닫고 남의 마음만을 개방하기를 기다려서는 참다운 일치가 불가능하다. 모든 선입견(先入見)을 버리고 자기를 내어줄 때 타인도 자기의 마음을 개방하게 된다. 특히 타인의 과거의 잘못에 집착하는 것은 대화를 통한 일치를 가져오는 데 큰 장애가 된다. 인간의 양심은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인격이나 양심의 성장을 인정할 때, 그리고 상대반의 과거보다 현재를 그대로 수용할 때 대화는 성공하는 것이다. 셋째, 대화에서 기피해야 할 일은 콤플렉스(complex)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 지식 · 능력 · 재산 · 지위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인격의 존엄성은 동등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지나치게 비하(卑下)하거나 자기의 인격을 스스로 경시할 때 서로의 마음이 교류될 수 없다. 참다운 대화는 겸손자애심(自愛心)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넷째 대화에는 유연성(柔軟性)이 요구된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 알고 잘못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자기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윗사람의 경우 위신(威信)이나 체면에 구애되어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합리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화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권력의지의 폭력화는 대화의 적이다. 다섯째, 대화는 계속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한 두 번만의 대화를 통해서는 인간관계의 벽을 무너뜨리기가 어렵다. 인간은 아집을 버리기가 어렵고 마음을 개방하기에는 많은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참다운 대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꾸준히 인내하면서 대화를 되풀이해야 한다. 대화의 포기는 서로가 아집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여섯째, 참다운 대화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충고를 하거나 예언직을 수행할 때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용기 있게 대화해야 한다. 용기 없어서 대화하지 못할 때 그것은 진리를 저버리게 되고 공동선을 추구할 수 없다. 일곱째, 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장소 · 시간을 잘 선택하는 것이 유익하다. 같은 대화라도 그 분위기에 따라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감정을 잘 분석하여 적절한 장소에서 적당한 시간에 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도 타인의 말을 들어 주는 자세이다. 우리는 흔히 대화를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참다운 대화의 명수(名手)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말을 조용히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큰 인내력과 겸손을 필요로 한다(야고 1:19). 그러나 타인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것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때 대화는 심포니와 같이 리드미컬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대화는 두 사람만의 경우도 있지만 최근에는 그룹대화가 많다. 그룹대화의 기본요소는 각자가 그 그룹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하나쯤은 무관심해도 좋다는 소극적 자세를 버리고 자기의 소중성을 느끼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솔직히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또 그룹의 구성원의 관심사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따라서 다수결보다는 서로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특히 유의해야 할 자세는 발전의 기회가 구성원 간에 균등해야 하고 비록 남의 말이 지나치게 길 경우에도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 다구나 남의 말을 자기의 선입견으로 판단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금물이다(로마 2:1-4). 윗사람의 입장에서라도 타인을 가르치는 자세보다는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는 겸손과 아량이 필요하다. 또 그룹대화에서의 언어는 공통어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올바른 대화, 즉, 진리공동선을 추구하다 보면 가끔 논쟁이 생길 수 있다. 논쟁의 목적은 보다 나은 상태를 창조하는 것이어야 하고 일치를 해쳐서는 안 된다. 특히 교회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논쟁은 보다 큰 다른 도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논쟁을 하기에 앞서 자기에 대한 도전 죽 회심(回心)이 선행되어야 한다. 논쟁이 때때로 분열과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권위에 의해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은 교회적이라 할 수 없다. 최근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대화를 촉진하는 많은 가르침이 발표되고 있다. 바오로 6세는 1953년의 회칙(Ecclesiam Suam)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의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비그리스도 교도와의 대화도 강조하였으며, 최근에는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와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갈라진 형제, 타 종파와의 대화를 통하여 교회가 일치해야 한다는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이 강력히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근거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사귐의 신비’(Mystery of Communion)라는 데서 연유한다. 교회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사귐을 이룩하는 곳이며 동시에 하느님 안에서 우리 인간들 상호 간의 사귐이 드러나야 하는 곳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는 이웃과 형제와 사귀고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요한 4:20-21). 하느님과 사귀고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과 사귀고 사랑한다는 것은 별도의 성질이 아니다. 따라서 이원론(二元論)은 극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귐은 바로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각각 다른 은총을 받았다(로마 12:3-8). 이렇게 다른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인격과 양심과 삶을 나누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요긴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적인 대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타인의 의견을 경청한다는 것은 타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교인적인 대화는 보충성(補充性)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의 장점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고 타인의 장점을 통하여 자기의 단점을 보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할 수 없다 따라서 서로의 불완전성을 긍정하면서 대화할 때 우리는 보다 인격화(人格化)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격화는 바로 신앙의 열매인 것이다. 올바른 대화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와도 대화해야 한다. 대화의 상대를 선택하는 것은 보편적이 아니다. 신자든 비신자이든 민족과 국가적 빈부와 귀천, 노소와 성별을 떠나서 같이 대화하는 자세야말로 가톨릭적인 대화이다.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대화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모두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는 평등성을 수용하면서 대화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적 대화를 위하여 세 가지의 단계를 밟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 단어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대화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친숙하게 사귐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신앙적 대화가 불가능하거나 그 효력이 적기 때문이다. 서로서로의 마음을 개방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둘째 단계신앙적 차원에서의 대화단계이다. 서로의 인격적 사귐이 이루어지면 같이 하느님을 나누고 하느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서로가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보다 성숙되기 위하여 서로 반성하고 격려해 주는 단계가 된다. 세 번째는 헌신적 차원의 단계이다.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은 사랑 · 봉사 · 희생이다. 이러한 소명에 따라 서로서로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봉사할 것인가를 대화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계획을 짜고 같이 활동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비약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한 경우 그 사귐이나 대화는 외형적 피상적인 것이 되기 쉽고 신앙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오늘날 세계 안에는 많은 불화와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원인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와 생각과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세계를 평화의 길로 이끄는 첩경은 서로 대화함으로써 상대방을 이해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 모든 인류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요한 17:20-21)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묵상하면서 대화를 통하여 일치를 가져오게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일치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韓庸熙)

   [참고문헌] 바오로 6세, Ecclesiam Suam, 1963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 / 岳野慶作, 폭력과 대화, 中央出版社, 1973 / C. 고젤, 대화의 세계, 1973.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