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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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Doucet, Camille-Eugene

   Doucet, Camille-Eugene(1853~1917).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정가미(丁加彌). 1917년 4월 19일, 1876년부터 40여 년간, 갖은 박해를 헤치며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인부주교 두세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 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1853년 11월 16일 쉬브롱(Chevron)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76년 12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25일 한국으로 떠났다. 이 때 한국에는 1866년 병인박해로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순교한 뒤에도 계속 박해가 끊이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877년 3월에 만주에 도착한 그는 9월 11일 리델(Ridel) 주교로베르(Robert)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닻을 내리고, 배천으로 들어가 1878년 1월말에는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두세 신부로베르 신부만나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였다.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니면서도 전교활동을 멍추지 않았고, 12월에는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도중,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간 병석에서 신음하는 고통도 겪었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 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1896년 코스트(Coste)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바쁜 봉사생활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몸이 노쇠해져 4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 봉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