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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인쇄

영어 Love

   적극적 친교로 이끄는 선(善)을 향한 정서적 경향을 뜻한다. 관계를 맺고 통일시키는 힘을 지닌 사랑은 자기 만족을 위해 어떤 대상을 찾는 이기적 사랑일 수도 있고, 통교를 통해 자기의 관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사욕 없는 사랑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사랑은 존재존재가 서로 이끌리는 것이다. 사랑만이 살아 있는 존재를 결합시켜 그 존재들을 완성하고 충족시킨다. 사랑만이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엇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고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큰 힘을 가졌으며 우주 에너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하느님이 창조 과정에서 모든 의식 체계에 부어 주신 이끌림이다.

  모든 존재하느님의 실재에 참여하며 거기서 하느님의 실재를 끌어들인다. 진실하고 충만한 존재로 통합되고자 하는 열망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뜻한다. 이는 이런 염원을 충족시켜 주는 사랑이 하느님의 선물(그러나 아주 새롭고 초자연적 존재 차원의 선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교 사랑이라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적 사랑이시고 인간 존재와 모든 피조물의 세상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교 사랑은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우리 영혼에 주입된 신적 덕행이다. 이 사랑은 다른 모든 덕행보다 뛰어난 덕행이다. 사랑은 영원하고 다른 모든 덕행을 완성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고 우리를 정화하며 하느님인간 사이에 참된 우정을 세워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학적 덕행이라 불린다. 신앙의 덕과 희망의 덕처럼 사랑의 직접 대상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당신 안에서 무한히 선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무한히 받으실 분이시다. 사랑은 또한 획득된 덕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부어 주신 덕행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의 승리는 강압이 아니라 설득력과 매력 또는 마음을 끄는 힘, 결코 소진되지 않는 무한한 사랑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적 사랑과 부부 사랑, 동료 간의 사랑 그리고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사랑이 드러난다. 우리가 참된 관계에서 한 개인을 사랑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과 온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전례 : 실천적 사랑

  전례는 신앙과 희망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회가 지극히 선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하느님께 바치는 ‘경배’는 지속적인 가톨릭 신앙고백이며 희망과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점을 간명히 표현하였다.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경배해야 한다”(「하느님의 중개자」 47항). 전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특별한 방식(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에서)으로 신도들을 당신께 끌어당기시고 그들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하여 아버지를 경배하게 하신다.

  더 나아가 전례 전체가 항상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아버지 사랑에 대한 인간의 최종 응답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역사 안에서 인류를 당신께 이끄시기 위하여 자부적인 무조건적 사랑을 부어 주시어 능동적으로 개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를 강화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참된 참여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참된 전례 참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사랑을 증가시킨다. 전례는 우리에게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

  하느님의 인간 사랑은 창조(창세 1장 - 부활 성야 제1독서)와 이스라엘 역사(신명 4,37 - 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욥기 38장 - 연중 제12주일 나해 제1독서)에 여러 차례 개입한 사실로 표현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유로이 선택하신 사랑(신명 7,7 - 시간전례연중 시기 제2주간 수요일 말씀 기도제1독서)이며 인간 구원을 위해 활동하며 인간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자비로운 사랑이다(호세 14,2-10 - 시간전례연중 시기 제19주간 월요일 말씀 기도 제1독서).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 성자죽음에 이르게까지 하셨다(요한 3,16 - 나해 사순 시기 제4주일 복음). 예수님의 역동적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완벽히 상응하며 신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 되게 하셨다(요한 5,20-25 - 사순 시기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더 나아가 이 활동적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났고(다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수난 복음요한 15,13 - 나해 부활 제6주일 복음) 비유를 통해 설명되었듯이(루가 15,11-32 - 다해 사순 시기 제4주일 복음) 자비롭다.

  전례는 참여자들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한다. 그래야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공유하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에게 속할 수 있는 것이다(5월 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미사본기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

  전례는 또한 우리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지적한다(마태 22,37 - 가해 연중 시기 제30주일 복음). 우리가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더욱 값진 분으로 평가하고 무거운 죄를 지어 하느님을 거역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다(고해성사 예식 참회자의 기도). 우리가 작은 죄마저 피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의 하느님 사랑은 더욱 완전해진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현재도 미래도, 권세도 높이도 깊이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 8,38-39 - 순교자 공통 제2독서).

  이 사랑은 감미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부모와 같이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하느님에 대한 느낌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 - 또는 모든 참된 사랑 - 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에 관해 말할 때, 사랑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을 최상의 선으로 인식하고 우리 의지로써 그분께 매달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뜻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마태 10,37 - 가해 연중 시기 제13주일 복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에게도 하느님께 대한 강력한 감정을 체험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랑의 시금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한 14,21 - 가해 부활 시기 제6주일 복음).

  전례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을 키워가고(연중 시기 제4주일 본기도)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참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요구한다(연중 시기 제30주일 본기도).

  자기 사랑

  전례는 또한 우리 영혼구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안녕을 잘 돌봄으로써 우리 몸과 이 세상의 것들, 곧 건강과 재산, 훌륭한 명예와 안전한 직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벌어들인들 목숨을 해치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태 16,26 - 가해 연중 시기 제22주일 복음). 토비트가 말한 것처럼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토비 12,10 - 홀수해 연중 시기 제9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러나 우리는 자기 사랑의 위험을 주의해야 한다. 잘못된 자기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마음이며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누가 재판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기주의는 사람을 과장되고 뻔뻔스럽게 만들며 양심도 없고 공격적이게 만든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자기 사랑의 길이 아니다.

  전례에 나오는 모든 본문은 균형 잡힌 인격의 자기 사랑을 가리킨다. 전례 본문들은 참여자들이 세상과 하늘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것을 항구히 요청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전례 본문들은 우리 영혼구원을 요구한다. 거의 대부분의 영성체 후 기도는 바로 이런 주제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연중 시기 제30주일 본기도에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얻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 뒤에 영성체 후 기도에서 “성체성사의 은혜를 저희에게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현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이웃 사랑

  신약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25-37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와 예수께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해 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여러분도 해 주시오”(마태 7,13 -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라고 말씀하신 황금률에서 볼 수 있듯이 전례는 우리가 이웃 사랑, 곧 세상의 모든 백성을 다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황금률에서부터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우리는 모든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심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며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되어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에로 부름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 나해 부활 제6주일 복음. 또한 제2독서인 1요한 4,7-10 참조). 그분은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시니, 모든 이 위에 모든 이를 통해 모든 이 안에 계신다”(에페 4,6 - 나해 연중 시기 제17주일 제2독서).

  이와 같은 이웃 사랑은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1요한 3,18 - 나해 부활 제5주일 제2독서).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비 행위를 실천해야 한다(선행 참조).

  그러므로 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은 전례를 통하여 서로 사랑(실천적 사랑) 안에 성장하고 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연중 시기 제25주일 본기도).

  이 같은 이웃 사랑에는 원수도 포함된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시오”(마태 5,43 이하 - 가해 연중 시기 제7주일 복음). 전례를 통해 참여자들은 이 점에 있어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성 스테파노가 차지한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되기를 기도한다(12월 26일 미사 본기도). 계명(誡命 Commandments), 신앙(信仰 Faith), 하느님(God), 희망(希望 Hope) 참조.
출처 : [전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