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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Robert, Achille Paul

   Robert, Achille Paul(1863~1922). 파리 외방전교회원. 대구교구 선교사. 한국명 김보록(金保祿). 그는 프랑스의 시골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두세(Doucet) 신부뮈텔(Mutel, 閔)신부를 만나 함께 공부하고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게 되었다.

   즉 187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77년 1월 25일 두세 신부와 함께 한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만주에서 리델(Ridel, 李) 주교와 만나 셋이서 함께 배를 타고 서울 근해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는 서울로 갔고, 두세 신부와 그는 함께 황해도로 상륙하여 산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로부터 강원도 이천(伊川)의 고메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878년 음력 정월 초에 리델 주교의 투옥사실을 전해 듣고 곡산(谷山)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흥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선교사교우들을 모욕하고 신부댁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정부당국이 로베르 신부를 대구로 호송함으로써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대구(大邱) 시외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 후 30년간 이곳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갖은 고난을 겪어가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느라 몸이 쇠약해져, 급기야는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사업에 종사하였으나 1919년에 다시 발병함에 따라 도저히 더 이상 전교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교관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정리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