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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전례 - 역사◆ 인쇄

한자 典禮 - 歷史
영어 Liturgy - History

   전례는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음에 제시하는 것은 개괄적인 내용일 뿐이다. 더욱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부록 3 : 전례 역사의 주요 사건들의 연대기 일람’ 참조.

  전례 역사는 여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원시 전례(1-3세기). (2) 예식의 성장(4-6세기). (3) 로마 예식의 고정(7-9세기). (4) 성직자 중심의 전례(10-15세기). (5) 예식 거행 지침주의 시기(16-19세기). (6) 전례 쇄신(20세기).

  (1) 원시 전례(1-3세기). 이 시기 동안 전례는 먼저 최후 만찬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전되었다. 이때의 전례는 유다인들의 전례와 식탁 기도에서 가져온 요소들을 포함하였다. 2세기에는 서방 교회 대부분의 집회에서 독서, 설교, 기도, 예물 봉헌, 감사, 영성체를 기본 틀로 가지고 있었다. 성체성사주일날 그리스도인들의 여러 가정집에서, 나중에는 경배의 집에서 거행하였다.

  처음에 주례자는 감사 기도를 포함한 기도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통일된 기도가 생겨나게 되었고 1세기 말에는 통일된 감사 기도가 있었다. 그 형태는 「디다케」, 성 유스티노의 「첫째 호교서」, 성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에서 발견된다. 아침과 저녁에 바치는 기도 형태도 발전하였는데 이는 시간전례와 같은 형태였다.

  3년 동안의 교리 교육 시기를 거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인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를 통해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전례력이 생겨나 예수 부활 대축일(2세기), 성령 강림 대축일주님 공현 대축일(4세기)과 예수 성탄 대축일(4세기)은 물론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를 보존하였다.

  (2) 예식의 발전(4-6세기). 4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새 평화 시기를 맞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안에서 합법적으로 종교를 신봉하게 하였다. 성당들이 건축되었으며 주교들은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전례는 더욱 아름답게 꾸며지고 잘 짜여졌으며 전례 때에는 그리스어 대신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전례에서 구원 사건들을 경축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주교는 사제단에 둘러싸여 부제들이 복사하는 가운데 전례를 거행하였다. 다른 봉사자들도 있었으며 백성은 공동체 예식에 완전히 참여하였다.

  제국의 주요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많은 수의 전례군(典禮群) 또는 전례 예식들이 생겨났다.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전례는 물론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전례, 바실리오 전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전례. ② 안티오키아에서 소야고보의 전례, 서부 시리아 전례와 동부 시리아 전례. ③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틴 전례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전례. ④ 로마에서 로마와 아프리카에서 기원하는 로마 - 북아프리카 전례. ⑤ 갈리아 전례 형태의 비로마 라틴 전례. 스페인(모자라비아) 전례, 갈리아 전례, 밀라노 전례, 켈트 전례.

  6세기에 와서 예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대림 시기달력에 첨가되었고 달력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성체성사 거행 때 사용되는 기도 모음들이 적혀 있던 리벨리 미싸룸이 소책자로 만들어졌다. 나중에 학자들은 「미사 전례 기도집」이라 불리는 이 기도 모음들이 여러 교황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미사 전례 기도집들은 「레오 미사 전례 기도집」, 「젤라시오 미사 전례 기도집」, 「그레고리오 미사 전례 기도집」으로 알려졌다.

  (3) 로마 예식의 고정(7-9세기). 로마의 전례 활동은 점차 제자리 걸음하게 되었고 7세기에 와서는 고정된 전례가 생겨났다. 카를 대제가 황제가 되자 전례를 포함한 모든 것에서 제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는 로마 전례서들을 도입하여 자기 왕국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프랑스독일성직자는 로마 전례서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필요와 문화에 맞게 고쳤다. 카를 대제 황실 수도자였던 알퀸은 「로마 미사 전례서」가 될 본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에 주일 본문을 첨가하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위한 전례를 삽입하였으며 부활 성야의 새 불 예식을 덧붙이고 다른 사항들을 바꾸었다. 이 「로마 미사 전례서」는 점차 제국 전체에서 통용되는 주된 본문이 되었다.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 새 전례는 고대 로마 전례의 더욱 단순한 형태보다 훨씬 더 풍부하였다. 여기에는 파스카 초 축복의 멋진 전례, 기원 미사들, 많은 수의 더욱 사적인 기도, 특히 사제가 자신의 죄를 사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기도들(이른바 사죄경)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들은 미사의 거의 모든 부분의 시작 때 조금씩 나타났다.

  고전 형태의 기도들에서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바치기보다는 직접 그리스도께 바치는 다른 많은 기도들도 생겨났다. 극심한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고통스러운 두려움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공동체적 성격이 더 이상 주된 흐름이 되지 않았다. 백성은 전례 거행에서 더욱 적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사제는 백성을 뒤로 하고 전례를 거행했으며 전에는 봉사자들이 하던 부분도 사제가 하였다.

  그 결과 사제를 위한 한 권의 책만 필요했다. 그래서 완전한 「미사 전례서」(Missale Plenarium)가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후렴, 기도, 독서, 감사송, 감사 기도 그리고 미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실려 있었다. 950년 마인츠의 성 알바노 수도원에서 이 모든 것을 포함한 한 권의 책이 「로마 - 독일 주교 예식서」(Romano-German Pontifical)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이는 주교가 미사 외의 다른 전례를 거행할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4) 성직자 중심의 전례(10-15세기). 프랑스 - 독일 전례는 로마 전례가 되었다. 그러나 문명의 쇠퇴로 인한 황폐화와 혼돈은 전례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직자는 전례 의무를 부주의하게 수행하기 시작하였고 백성은 전례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이 기간은 붕괴와 역작(力作), 재해석과 잘못된 해석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백성은 더 이상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봉헌 행렬과 같이 한때 자신들이 수행했던 몇몇 행위조차 잃어버렸다. 그들은 매우 드물게 영성체했으며 미사에 참여하기보다는 ‘구경꾼’이 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들은 제단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사제는 등을 돌린 채 미사를 드렸기 때문에 신도들은 미사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병축성한 후 성체를 거양하는 것과 성작을 거양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전례는 성직자의 사적인 영역이 되었고 백성은 점점 더 전례에 마음의 문을 닫아 걸었다.

  수도원과 주교좌성당들에서 사용하던 고전 로마 시기의 전례와 프랑스독일 시기의 전례는 너무 화려해서 모두에게 통용되는 유산이 될 수 없었다. 로마 교황청에서 일하던 한 성직자가 이를 받아들여 12세기와 13세기 아주 작은 공동체들에서도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미사 전례서」, 「성무일도서」, 「주교 예식서」였다. 새로 창설된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이 전례서들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전체에 확산되었다.

  (5) 예식 거행 지침주의 시기(16-19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전례 개혁을 단행하여 서방 교회에서 인식할 수 있는 로마 전례를 복구하였다. 공의회성인들 미사와 기원 미사 등 중세 때 첨가된 대부분을 삭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제대 발치에서 하는 기도(시편 42)와 미사 끝의 마지막 복음처럼 공동체 예식으로서 미사에 맞지 않는 몇몇 부분을 보존하기도 하였다. 소미사가 새로 강조되기도 하였으나 손으로 하는 영성체성작에서 성혈을 영하는 것은 복구되지 않았다.

  공의회는 복구된 예식들을 엄격히 지켜야 할 예식 거행 지침에 삽입하였다.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공의회는 나중에 발전할 수 있었던 전례를 보존하였다.

  공의회는 퀴논스(Qhinones)의 성무일도서를 제거하였다. 전통적으로 공동체 기도를 노래하는 것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사 거행에서 준수해야 할 사항과 배제해야 할 것들’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였다. 이 교령은 전통을 고수하면서 전례 개혁을 수행하였다(전례의 혼란스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엄격한 획일성에 관심을 집중한 공의회는 의무적으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예식 거행 지침을 실은 미사 통상문을 만들었다. 후임 교황들은 공의회의 정신을 신속히 수행하였다. 비오 5세 때 「로마 성무일도서」(1568년)와 「로마 미사 전례서」(1570년)가 나왔고, 클레멘스 8세 때에는 「로마 주교 예식서」(1596년)와 「주교 의식서」(1600년)가 나왔고 바오로 5세 때에는 「로마 예식서」(1614년)가 빛을 보았으며, 개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식스토 5세는 1598년 예부성성을 만들었다.

  그와 같은 개혁의 이점들을 과대평가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례 개혁은 16세기의 위기에서 교회를 보호하였고 참된 예배를 위해 유효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혼합된 중세 형태로 개혁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이 전례의 근저에는 고대 로마 전례의 본질적 유산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개혁은 우리 시대에 영성 생활의 원천과 전례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6) 전례 쇄신(20세기). 1903년 비오 10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 시대에 전례 역사의 마지막 단계를 시작하였다. “[백성이] 거룩한 신비들과 교회의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의 가장 우선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원천이다”(뜨라 레 솔레치뚜디니). 교황의 발언은 전례 운동(이는 이전의 여러 사건들, 특히 19세기 프로스퍼 궤랑제 신부의 저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생겨나게 만들었다.

  40여 년 뒤 가톨릭 세계 전체에서 전례의 씨앗이 기반을 다진 뒤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의 유명한 회칙 메디아또르 데이(「하느님의 중개자」)를 반포하였다. 회칙은 전례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당시에 발전하고 있던 전례 운동을 인준하였다. 계속해서 비오 12세는 부활 성야성체성사 거행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로마 미사 전문(감사 기도 제1양식)에 성 요셉의 이름을 삽입하였는데 이는 약 삼 백 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본문을 바꿀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전례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국제 학술회의도 1951년에 시작되는 전례 개혁에 길을 텄다. 이와 연관하여 무엇보다도 1956년 아시시에서 있었던 사목 전례 국제 학술회의와 1960년 뮌헨에서 있었던 성체대회가 특히 중요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였고 1963년에는 첫 번째 문헌이자 획기적인 문헌인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을 반포하였다. 전례 헌장은 전례를 교회 전체 활동의 원천과 정점으로 정의하고 대대적인 전례 개혁을 요청하였다. 25년 이상에 걸쳐 대규모의 개혁이 있었고 거의 완성되었다.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 바티칸 공의회, 제2차(~公議會 Vatican Council, Second), 성사(聖事 Sacraments), 전례서(典禮書 Liturgical Books), 전례 운동(典禮 運動 Liturgical Movement), 준성사(準聖事 Sacramentals) 그리고 전례서들에 나오는 개별 항목들과 미사, 준성사, 성사의 부분들 참조.
출처 : [전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