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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의 오해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9 조회수460 추천수4 반대(0) 신고
 
 
 

세상의 오해 - 윤경재

  

“내가 물러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롭습니다. 사실 내가 물러가지 않으면 협조자가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면 여러분에게 그분을 보내겠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며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서 (밝히실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그들이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러나 의로움에 대해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여러분이 더 이상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의 두목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요한16,7-11;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인간은 늘 미래와 하느님의 일에 대하여 궁금해왔습니다. 그래서 온통 미래를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에 매달렸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일에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 힘들어 가능하면 아무런 책임 없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이 통하는 세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대로 술술 풀렸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 공연히 불행해지고 의기소침해 집니다.

 히브리 성경 저자들은 미래와 하느님의 일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인간의 본성을 예언자 모세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탈출기 33,18절에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여쭙니다. 하느님의 얼굴과 모습을 보여 달라는 이 말의 속뜻은 하느님의 본심 즉,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미리 알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불안하니 미리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달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우리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세로 대표되는 인간의 얄팍한 의도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의지를 아주 솔직하고도 분명하게 천명하셨습니다. 첫째, 당신의 선한 의지를 인간에게 계속 보여줄 것이며 둘째,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여 당신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어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아는 사이가 될 것이며 셋째, 자비와 동정을 베풀되 당신의 뜻에 합당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본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조정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나 비로소 ‘아하’ 하고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얻은 교훈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둔한 인간은 자주 이 값비싼 체험을 잊고 맙니다. 탈출기의 교훈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못하고 남의 이야기로만 귀동냥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경저자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입을 통해 궁금증을 미리 해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면서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야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협조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주시는 분”,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실 분”, “주님께서 떠나가셔서 그분을 보내고,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파라클레토스 성령께서 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실지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저질렀던 오해를 계속 반복해서 저지르는 세상의 잘못을 다시 바로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이 하느님이나 된 양 범하는 잘못을 세 가지 면에서 요약하고 정정해 주십니다. 그것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 가졌던 세상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착각이었음을 뜻합니다.

 세상의 두목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달아 올려 승리했다고 믿는 그 순간 그는 패배자로 심판받은 것이며,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바로 의로움이며, 그 아드님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뜻은 세상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을 앞세우다가는 오히려 정 반대의 결과만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신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습니다. 신앙의 선조가 그렇게 보고자 했던 주님의 영광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선택만 남았습니다. 믿을 것이야 아니면 물리칠 것이야 그 선택을 올바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백 척이나 되는 뾰족한 대나무 끝에 매달린 신세니 용감히 발걸음을 떼라는 선사의 간절한 요청이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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