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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66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4 조회수391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도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들은 차라리 순수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시험하고 있지만 요즘은 이런 논쟁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던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부르는 이런 모습은 우리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율법 학자의 의도는 예수님께 배움을 청한 것이 아니라 십계명의 제1계명인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런 답변을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 오늘 게시된 복음에서는 일부가 누락되어 이런 의도를 읽을 수 없고 오히려 배움을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경에는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로 시작되고 있으므로 질문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어느 한 소절만 생략하여도 뉘앙스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오늘 게시된 복음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도를 이미 알고 계셨지만 제1계명인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대신에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흠숭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므로 천지가 개벽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묵상은 이 점을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흠숭할 방법을 몰라서 흠숭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입니까? 매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일까요? 교회 지도자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십일조를 착실히 잘 납부하는 것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유대 민중들이 관념적으로, 규범적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진정으로 흠숭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에서, 성경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신성한 예식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있습니다. 느낀다는 것은 각 개인의 관념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으므로 그 느낌이 모두가 똑 같을 수는 없습니다. 또 그 느낌을 영원히 지속시킨다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느낌을 변함없이 지속시키기 위해서 즉, 하느님의 현존을 지속적으로 느끼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미사 참례와 말씀의 묵상과 기도 생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첫 계명으로 알려주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존중하여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실천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은 어버이 마음과 같다는 것을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알려 주셨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은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우애 있게 지내는 것보다 더 바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첫 걸음은 바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가톨릭 성가 415번가사가 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그 대상이므로 우리는 '우리'라는 이런 좁은 울타리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속에 갇혀 있고, 그 좁은 울타리 안에서 또 서방 교회와 동방교회로, 서방 교회 안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로 또 나눠서 좁은 우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와 다른, 우리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교도와 배교자 등 이렇게 구분하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도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 5,46-47)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모 스님께서는 어느 신학대학의 초청 강연에서 "스님은 하느님의 자식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여래의 자식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런 열린 마음이, 이런 열린 종교관이 그 어느 때보다 아쉬운 요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하여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 찬동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 학자는 성경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율법학자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호세 6,6)하신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개신교의 성경에서는 이 말씀에서 '신의'를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3-24)하신 산상설교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있다면 그 표징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날 것이며, 사랑의 실천 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설사 있다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말씀하신 첫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은 이를 실제로 실천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계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발전된 사상이 바로 '사람이 곧 하느님'이라는 人乃天 사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다'는 사고로 더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발전시켜서 오늘 말씀을 요약한다면 '우리는 매사를 하느님께 감사하고(事事佛供),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다(處處佛性)' 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우리'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서
같은 우리 속에 속하지 않으면 온갖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한, 저희는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차별이 없는 사랑의 성령님을 보내 주시옵기를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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