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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56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30 조회수399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7-62

그때에 57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런 부르심을 우리 신앙에서는 聖召라 하며 이를 우리 실 생활의 관점에서 묵상하면 人選에 관한 교훈입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고위공직자의 인사청문회로 시끌시끌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의 선발대회를 하는 것 같아서 오늘 복음은 시의 적절하게 고위공직자의 人選에 대한 가르침을 알려주신듯 합니다.

요즘 인사청문회를 보며 느낀 점은 고위 공직자가 되겠다는 사람치고 깨끗한 사람을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인선하는 책임 있는 사람이나 이를 묵인하는 국민들이나 모두가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교가 하는 일은 사회 도덕성을 회복하는데 존재이유가 있음에도 우리 사회가 갈수록 도덕불감증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직 교세확장에만 여념이 없기 때문에 도덕불감증이 더 심화되고 있으므로 이런 현상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먼저 종교지도자들부터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첫 번째 경우와 세 번째 경우는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경우는 예수님께서 부르셨지만 사양한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경우에는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였습니다.

노자 도덕경에 보면 使夫智者 不敢爲也 (사부지자 불감위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소위 아는 것이 많다며 무엇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감히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사람은 늘 겸손하여야 하고 사양지심이 있어야 합니다. 설익은 지식으로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사람의 경우가 오늘 복음에서의 첫 번째 경우이며 마태 복음서에 의하면 이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처럼 설익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지식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은 아예 생각치도 말라하시며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찮은 지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영화를 누리려는 사람들에게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이런 식자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며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아니므로 늘 식자들이 우환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비를 실천하며 복음을 전파하는데 무슨 학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학식 등은 자비를 실천하는데 오히려 장애만 될 뿐입니다. 우리 교회도 실제로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름 없는 평신도들이며 고위직에 있는 성직자분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성직자분도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잠잘 곳이 없는 우리 이웃들이 많이 있음에도 그들을 위해 사제관을 개방하는 그런 성직자가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하셨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스승님보다 더 높을 수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우리 신부님들은 어떻게 강론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부르신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발하신 과정을 보면 고기잡이 어부인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였으며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에게도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며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학식이 많은 사람을 제자로 부르지 않았으며 비록 아는 것은 없지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으며 그 이유는 '아는 것이 권력이다'는 잘못된 사실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뵈올 때에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런 사양지심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인사청문회를 보면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흠결이 많아서 국민에게 귀감이 되는 고위 각료가 될 수 없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사청문회가 아니라 얼굴 철판두께의 경연대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성을 쌓는 것은 修身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며 수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하나하나 체득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스스로 앞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은 두 번째 경우의 사람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요청마저도 예수님이 거절하였다면 이는 우리 동양적 관점에서는 인륜을 저버리는 패악 무도한 짓에 해당됩니다. 아마 서양의 장례도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신중히 조심스럽게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을 전파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일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저는 이 말씀은 너무나 조심스럽기에 조금 다른 각도에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즉 사양지심에서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 사실과 다른 이유를 들어서 그 청을 거두어 주십사하고 요청하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훤히 꿰뚫고 계신 예수님은 그만 사양하라는 뜻에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묵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거나 또는 잘못 인용한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에 큰 해악을 가져올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며 실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조상의 위패를 소각한 사건보다 더 큰 사회 문제로 비화되어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 땅에서 제2의 박해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 전파도 중요하지만 부모 장사도 치루지 말라는 말씀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명약도 잘 써야 명약이고 잘못쓰면 독약이듯이 성경 말씀도 제대로 이해하여야 복음이고 그렇지 않으면 화음(禍音)이 될 수 있음을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빈말을 하는 경우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예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헛소리를 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럼, 나를 따라라' 하실까 걱정이 되어 미리 방어막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런 경우가 아닌지를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사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신심이 깊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불우이웃을 돕자고 하면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서 얌체 짓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 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수행을 통한 修身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남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인맥을 넓히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고 기억하여 언제나 낮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함을 새롭게 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고위 공직자의 인선의 가르침을 주셨음에도
지금 우리 사회는 고위 공직자의 잘못된 인선 때문에 선량하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여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과연 무엇 때문에 그 십자가가 필요한지 회의감마저 들고 있습니다.
부디, 불의를 물리치시는 성령으로 저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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