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육신의 관계에서 떠나 영적인 관계로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0 조회수498 추천수3 반대(0) 신고
 
 

 

육신의 관계에서 떠나 영적인 관계로 - 윤경재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유대인들은 인간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적인 면, 정신적인 면, 영적인 면이 그것입니다. 본래 하느님께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혼연일체가 되도록 창조하셨으나 인간이 죄에 물들어 영적인 면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영(루아흐)은 하느님의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 주입되어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을 말합니다. 영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에 소멸하지도 죽음을 초래하지도 않는 영생의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육체와 정신에만 몰두한 나머지 영을 그만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육체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정신만을 제 것으로 알고 소중하게 섬겼습니다. 영적인 성장도 키워야 했지만, 영은 잊고 말았습니다. 간혹 영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영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머리가 깨인 사람들이나 철학자들도 영을 우주적인 힘이나 활력 정도로만 생각했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생명력으로까지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다른 종교나 철학자들이 영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조차 말로는 영을 되뇌었지만, 예수님만큼 온전히 영의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전하는 예수의 모습은 철저히 하느님 한 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 자리 잡고 사시면서 겉으로 드러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라 살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보장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보상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했으니까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보상으로서의 추구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어버릴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복음서에서 나오는 이 여인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간의 행복을 안다고 여겼습니다. 여인이 사용하는 단어도 지극히 육적입니다. 당신을 밴 태라든가 젖을 물린 젖가슴 등의 표현은 원초적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녀의 행복관은 그르지 않았습니다. 맞지만,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잉태하고 키우면서 육체적 교류가 주는 행복감과 성취감은 사실 지극히 높습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행복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결하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부귀와 권력을 얻은들 모성의 행복감만 하겠습니까. 자신의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대며 발길질할 때 느끼는 감정은 그 어떤 수사로도 비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여인들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남성들과 달리 먼저 사랑을 느낍니다. 모성은 아이의 배냇짓을 상상하며 온갖 미래의 꿈을 꾸게 하는 위력을 지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모성의 행복과 가치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고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입니다. 준행한다(phylasso)는 동사는 소중히 여기면서 보호하고 지켜주며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미가 아이를 키우듯 보호하면서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도 자라서 보답할 것입니다. 영을 뿌리내리게 하고 지켰으므로 아버지와 하나 되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모성이 꿈꾸었던 미래는 간혹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대와 결과가 어긋나고 벌어져 실망을 주기도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은 우리를 속이는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속일 뿐입니다. 영을 말하면서도 육과 정신에 매달려 혼동하고 오해하여 스스로 기만할 뿐입니다. 

여인에게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북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국 우리도 육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한계는 스스로 정한 울타리이며 회피의 그늘입니다. 눈을 한쪽에만 머물게 하는 제약입니다. 아무리 영의 차원을 이야기해도 믿지 못하기에 여전히 고난과 고통 속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과 정신의 가치가 영의 차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맞닥뜨렸습니다. 육신과 정신을 모든 것으로 아는 가치를 죽여야만 영의 부활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첫 번째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육신의 관계를 떠나 영적 관계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