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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제성장 논리는 은폐된 국가주의> - 김종철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10 조회수456 추천수1 반대(0) 신고
 
경제성장 논리는 은폐된 국가주의
[한국판 창간 1주년 특집] 국가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민중에 내면화된 ‘정신적 습관’… 결과는 불행한 소외뿐
더 많고 밀도높은 민주주의 위해 필요한 건 연대와 협동
 
[13호] 2009년 10월 06일 (화) 18:22:33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info@ilemonde.com
 

지금 일본에 이른바 ‘지(知)의 거인’이라고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라는 독립적인 저술가, 저널리스트가 있다. 그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광범하고 심층적인 독서와 자료조사를 통한 두툼한 보고서를 정력적으로 출판함으로써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지식인이다. 특히 몇 년 전, ‘일본 사회에 대한 진단과 전망’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 <멸망하는 국가>에서 그는 태평양전쟁이나 평화헌법 등에 관한 일본 극우세력의 국가주의적 자세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그것은 많은 한국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바로 그 책에 그의 정치적 양식(良識)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만한 발언도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는 일본이 독일처럼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언급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태평양전쟁의 잘못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패전의 결과로 조선과 대만, 만주를 잃은 것을 애통해한다. 즉,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조선을 비롯한 구식민지가 여전히 일본 영토가 돼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별로 놀랄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해온 진보적 지식인 중에도 전쟁의 책임 외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을 말해온 사람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대개 러일전쟁 이후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화 노선에 대해서는 치열한 비판을 하면서도 왠지 그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식민지 침략과 지배라는 엄연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을 유보하거나 침묵해왔다. 다치바나의 유별난 점은 식민지의 상실을 드러내놓고 아쉬워하는 그 솔직함일 것이다.

일본 지식인의 한계도 ‘국가’

결국 이것은 그들이 국가의 구성원, 즉 ‘국민’으로서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오랜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국가라는 괴물이다. 국가의 틀 속에서 사유하는 한, 지식인이든 아니든 타 국가, 타 민족을 경쟁적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의 인간다운 자존심과 긍지가 자기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제국주의나 군국주의 혹은 파시즘이 시대착오적인 절대 금기처럼 된 오늘날에도 사정은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다. 국가주의적 정서는 형태를 달리했을 뿐, 여전히 다수 ‘국민’의 심층 심리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국가주의가 군사적 대결이나 모험의 형태로 표출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것은 대체로 ‘국제경쟁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성장’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현대국가는 본질적으로 경제성장 지향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정치가치고 경제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유권자도 이에 동조해 표를 주는 게 상례이다. 경제성장은 비단 고용 문제나 빈곤 퇴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적·사회적 문제까지 해결해줄 수 있는 마술 지팡이 같은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 논리 자체를 문제 삼는 정치세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경제성장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민중의 구체적인 삶에 어떤 측면에서든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경제성장이란 일정 기간 국민이 소비를 위해 지출한 화폐의 총량을 나타내는 수치의 증가를 뜻하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이렇게 계량화될 수는 없지만 인생에서 좀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가치들- 인간적·사회적 유대, 문화적·예술적 활동 등- 은 여기서 배제되기 마련이다. 물론 경제성장은 재화와 서비스 소비의 총량의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 전체의 부의 증대에 기여하고, 그 결과 이른바 ‘적하(滴下) 효과’에 의해 밑바닥 민중의 생활수준을 들어올리는 데 이바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경제성장의 결과, 오늘날 한국에서 냉장고를 소유하고 자동차를 굴리는 생활은 이미 특권층을 넘어 서민의 일상적 생활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생활수준이 아닌 삶의 질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여기서 물어보아야 할 것은 그동안의 경제성장에 의해 오늘의 풀뿌리 민중이 과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민중의 생활 향상 의욕을 가볍게 보자는 게 아니다. 빈곤은 극복돼야 하고, 누구에게나 일자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흔히 생각하듯이 경제성장을 통해 이런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제성장은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를 계속 증가시킴으로써 국가 전체의 경제 규모를 증대시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자립적 생존의 토대는 끊임없이 파괴된다는 게 근본 문제다.

도시 재개발이 진짜 파괴한 것은?

경제성장이란 자본이나 국가 어느 쪽을 위해서든 필요한 개념이다. 자본은 계속적인 자본 축적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는 뿌리 깊은 자기 확대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을 필요로 한다. 물론 국가는 일차적으로 고용 문제 해결과 세금 징수를 위해서도 경제 규모의 계속적인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민중은 이러한 성장 논리에 동화돼, 성장이 없다면 자기들의 삶도 곤란해질 것이라는 정신적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명확히 해야 할 것은 모든 자본 축적 과정이 그렇듯이 경제성장의 메커니즘 역시 기존 사회적 격차를 토대로 해서만 작동하며, 동시에 성장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격차를 심화해놓는다는 사실이다.

   
▲ <대동여지도> 중 낙동정맥본 부분-김정호
오늘날 기업 간 경쟁의 격화와 기계화·자동화 기술의 발달, 그리고 무엇보다 금융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글로벌 카지노 경제 시스템에서 경제성장은 갈수록 고용 없는 성장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설령 경제성장이 고용 기회의 증대에 기여한다 하더라도, 그 고용 형태는 지속 가능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성장으로 어느 정도의 풍요와 안락이 기대된다 하더라도, 그 풍요와 안락은 표피적이며 일시적인 것일 뿐임은 경제성장을 통해 민중의 자립적 삶의 토대, 즉 공동체적 삶의 질서와 자연 생태계가 반드시 파괴되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가 도시 재개발이다. 오늘날 도시 재개발 지역은 원래 농촌 공동체가 파괴됨으로써 도시로 몰려온 뿌리 뽑힌 사람들의 서식지이지만, 비록 온전치는 못해도 그 속에는 최소한의 공동체적 삶을 가능케 하는 호혜적 상호부조의 공간이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이 ‘재개발’에 의해 완전한 무기질(無機質)의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한다면, 그동안 가난한 도시 서민이 기대왔던 최후의 인간적 삶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진보적 지식인은 흔히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뉴타운’ 건설에 따른 원주민의 입주 비율을 거론하곤 하지만, 그것은 민중 공동체의 전면적 붕괴라는 현실에 비춰볼 때는 부차적인 문제다. 요컨대 경제가 성장할수록 민중의 자립적 생존의 토대인 공동체와 자연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이 허물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핵심적인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이 상황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심각한 후퇴를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최근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이념이 아니라,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는 주장이 부쩍 빈번하게 말해지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진보’세력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려면 새로운 경제성장에 대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른 보면 나무랄 수 없는 주장인 듯하지만, 실은 이런 발언의 배후에 있는 사고방식은 매우 낡고 진부한 것이다. 이 사고방식에는 역사에서 조금이라도 배운 게 있다는 흔적이 들어 있지 않다. 그들은 경제성장이란 새로운 것이든 아니든 본질적으로 밑바닥 민중의 구체적인 삶에서는 재앙일 뿐이라는 근본적 사실에 대해 완전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 진보세력도 오판하고 있는 것

중요한 것은 지금 현실의 민중이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원한다고 해서 민중에게 경제성장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중은 지난 수십 년간 국가와 자본이 주도해온 경제 현실에서 성장 논리 외에 어떠한 활로가 있는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데 곤란을 느낄 뿐이지, 그들의 몸이 성장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치사상가 해나 아렌트의 말처럼 빈자(貧者)는 ‘자유’가 아니라 ‘풍요’를 이상으로 삼기 쉽고, 노동자는 자본이나 국가에 고용돼 임금이나 급료를 받고 살아가는 것 이외의 삶을 구상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소외 노동에 오래 길들여진 노동자는 참으로 인간다운 노동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약자끼리의 연대와 협동을 통해 새롭고 자유로운 노동 형태와 삶의 양식을 개척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기성 체제에서 개인적인 성공을 통해 억압적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복권 당첨을 꿈꾸는 것 이상으로 허망한 것임을 오늘의 사회적 약자가 모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서로서로 끊임없이 깨우침으로써,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성공’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이라는 근본적으로 반민중적 억압의 체제에서 벗어나 민중이 자립적·자치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을 사회 저변의 연대와 협동운동을 통해 광범하게 형성하는 노력이라는 인식을 널리 공유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불행은 궁극적으로 정신적 빈곤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서 식민지 시대를 미화하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란 것이 버젓이 학문의 이름으로 활개를 치는 현실이 말해주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안전과 안락을 위해서는 자유인의 삶을 포기해도 좋다는 전형적인 노예의 논리다.

인간의 역사는 물질적 안전과 안락을 위해 자유를 방기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믿고, 자기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온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민주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가난하더라도 자유인으로 사는 게 더 떳떳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삶이 민주주의 없는 경제성장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은 민중의 자립, 자치의 권리를 유린하는 원흉이며,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많고, 더 밀도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고는 이제 민중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더는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글·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전 경북대 교수. 저서로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간디의 물레>(1999),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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