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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비가로 건너가는 열쇠말, 연민> - 한상봉
작성자송영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24 조회수745 추천수0 반대(0) 신고
 
신비가로 건너가는 열쇠말, 연민
 
2009년 11월 20일 (금) 16:20:17 한상봉 isihan@nahnews.net
 

가톨릭교회에 입문하면, 제일 먼저 생기는 게 '세례명'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닮고 싶고 흠모하는 성인들을 주보성인으로 삼아 그 이름을 제 이름 뒤에 붙여 쓰곤 합니다. 그들은 신비가이며 복음의 증인이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룬 전사들입니다. 현인이며 스승이며 영적 친밀감을 나누는 연인이기도 합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예전에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란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처럼  신비가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배회하거나 아예 세상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고난과 아픔에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신비가’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 성령의 빛이 비추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을 드러내 주는 말을 저는 역설적이게도 강력한 무신론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의 말에서 찾습니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간디와 스코트 니어링 등 그리스도를 믿음 안에서 고백하지 않더라도 거룩한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 그들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내적인 조화가 보통의 인간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큰 기쁨을 느끼며, 자신이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고, 그 사람 안에서 빛나고 있는 불꽃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그 불꽃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에 접속된 것일 테지요.

연민에 관하여

   
▲시몬느 베이유
벌써 아득한 일이지만, 십 수년 전에 대학원에 다닐 때 졸업논문으로 준비하던 주제가 시몬느 베이유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결국 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십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미련처럼 남아있던 논문을 ‘도로시 데이’에 대한 이야기로 써서 학교에 제출했습니다. 허나, 그제나 이제나 관심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사회적 실천’ ‘영성과 사회적 투신’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과 세상과 인간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 투신을 요구하는지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신자이면서 교회를 넘어서, 신앙 안에 있으면서 교리를 넘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붓다에서 노자까지 아우르며 어떻게 하느님 자비의 바다로 건너갈지 고민했던 것입니다. 제가 건너가지 못하더라도 그 길을 탐색하는 수행자가 되려는 열망 때문입니다. 그 어깨를 밟고 누군가 건너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발견한 가장 위대한 낱말은 ‘연민’(憐愍 sympathy)입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시인 황지우는 “그러므로 길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니/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고 ‘산경’(山徑)이란 시에서 말합니다. 이어 ‘박쥐’라는 시에선 이렇게 말하죠. “현실에서 나의 시적 통로는 연민이오. 연민에는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의 그것이요, 다른 하나는 상처받은 자들의 그것이오. 나의 그것은 나의 상처요, 라고 답할까? 아냐, 연민은 임포야, 혁명의 설사제야” 황지우는 자기 연민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모든 슬픔 앞에서 진동하고 있는 거지요.

‘네’ 아픔을 ‘그’ 아픔으로 바꾸라

말년을 새벽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시대 신비가 헨리 나웬은 ‘네’ 아픔을 ‘그’ 아픔으로 바꾸라고 주문합니다. 아픔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시간에 너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거절당하고 버림받았다는 네 느낌,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네 생각은 구체적인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답니다. 그래서 고통은 특별합니다. “예수의 고통도 분명히 그랬다. 제자들이 그를 떠났고, 빌라도가 그를 심판했고, 로마 군인들이 그를 고문하고 십자가에 매달았다.”

헨리 나웬은 우리의 아픔이 나만이 겪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어딜 가든 마주치는 인간의 현실이란 사실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아픔은, 그것을 통해서 인류의 아픔에 동참하는 너의 구체적인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네’ 아픔(your pain)에서 ‘그’ 아픔(the pain)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합니다. 나만 당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화가 나고 분개하고 앙심을 품게 됩니다. 아니면 아픈 현실에서 멀리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치유는 내 아픔을 인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자를 용서하고 아픈 현실을 다른 이들과 함께 넘어서며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웬은 그게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신 예수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예수의 고통은, 그만의 독특한 고통이면서, 모든 인류가 겪는 고통이 됩니다. ‘그의’ 아픔(his pain)이 ‘그’ 아픔(the pain)이 됩니다.

“너에게 아픔을 안겨 준 외부상황에서 눈길을 돌려 네가 함께 있는 인류의 아픔을 바라볼 때마다 네 괴로움은 그만큼 견디기 쉬워진다. 그래서 ‘가벼운 짐’과 ‘편한 멍에’로 바뀐다(마태 11,30). 네가 배고픈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갇힌 사람들, 쫓겨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면, 그 순간 너의 개인적인 아픔은 인간의 아픔으로 바뀌고 너는 그것을 견뎌낼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있다.”

   
▲사진/고동주

문규현, 아름답고 거룩한 심장

이 희망을 건져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단식에 들어갔던 사제가 있었습니다. 문규현 신부입니다. 용산에서 억울하게 죽은 철거민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이 그를 죽을 고비로 밀어붙였습니다. 이윽고 심장이 멎어 쓰러졌지만, 이삭을 아브라함의 칼에서 구하셨던 그분께서 문 신부의 생명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문규현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지 33년째 되는 해입니다. 문 신부는 예수처럼 당신의 생애를 한번 크게 접은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그 길을 갈 테지요.

심장마비, 가련히 여기는 마음이 들끓어 심장이 멈출 정도로 부풀어 올랐던 모양입니다. 아름다운 심장입니다. 뜨거운 가슴입니다. 사전에는 심장을 의학적 용어로 “주기적인 수축에 의하여 혈액을 몸 전체로 보내는 순환계의 중심적인 근육 기관. 어류는 1심방 1심실, 양서류는 2심방 1심실, 조류와 포유류는 2심방 2심실이다. 사람의 경우에는 흉강 내의 중앙보다 왼쪽에 있고, 주먹보다 약간 큰 근육질 덩어리로 원추형의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심장이 어디 이런 설명으로 만족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자비심을 ‘성심’이라 합니다. ‘거룩한 심장’이란 거지요. 마리아의 애련한 마음 역시 우리는 ‘성모성심’이라 부릅니다. 살아 있는 목숨들에 대한 연민을 길어올리는 발전소가 아니라면 어느 것도 거룩한 심장이 될 수 없겠지요.

2008년 9월 4일 문규현 신부는 수경 스님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겠다”며 지리산 노고단에서 출발해 생명평화를 위한 오체투지 순례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란 먼저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을 던져 절을 하며 생명평화를 바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제가 일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편지를 보내며 그분이 이렇게 썼더군요.

“다시 순례 길을 떠납니다. 다리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입니다. 이 둘이 오체투지, 온 몸을 땅에 내리고 보듬으며 갑니다. 가늠도 안 되게 고되고 하염없이 느린 길을 기꺼이 갑니다. 허나 우리의 고행이 도리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이 순례가 위로의 길, 용기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이 여정이 민족의 길, 화해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애달픈 하소연

그렇게 순례를 떠났던 문 신부가 용산참사로 죽은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다시 단식으로 순례를 했던 것이지요. 그는 지난 10월 12일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아픔과 시련의 현장이라면 어디서든 당신들의 기도 순례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지요. “단 한 명, 한 하나의 생명도 외롭고 억울하게 울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하느님의 길을 계속 갈 것”이라 했지요.

“겨울, 봄, 여름, 가을 사계절이 순리처럼 한 바퀴를 돌아가고, 설을 지내고 추석을 보내며, 달력을 넘기고 날짜를 지워가도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습니다. 그 추운 겨울 새벽, 물대포 세례를 받으며 두들겨 맞고 불타 죽은 그 불쌍하고 억울한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여전히 더 춥게 냉동고 속에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검은 상복은 그날처럼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유가족들의 고통과 피눈물은 그날처럼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매일이 지옥인 며느리와 아들들, 아내들은 오늘도 여전히 ‘여기 사람이 있다!’고 울부짖습니다. 하느님께선 오늘도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제발 눈길 좀, 손길 좀 주라고 애원하십니다.”

가련한 이들의 호소를 하느님의 애달픈 하소연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신비가의 반열에 들어설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내 아픔에 붙잡혀 있지 않고 그 아픔을 겪는 세상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 길에서 모두 강녕하시길 빕니다.

*<야곱의 우물> 2009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약간 손질해서 지금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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