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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분의 가슴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불타게 하라> - 정중규
작성자송영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25 조회수593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분의 가슴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불타게 하라"
[정중규 칼럼]
 
2009년 11월 24일 (화) 10:07:46 정중규 mugeoul@hanmail.net
 

   
▲대구대학교의 가을(사진/정중규)

하루가 다르게 창 밖 풍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달라져간다. 깨질 듯 얼음장 같은 하늘빛이 다르고, 군상들의 잔뜩 움츠린 모습이 다르고, 비명처럼 날카로워지는 새 소리가 다르다. 천지에 드리워졌던 커튼을 젖힌 듯 한껏 여위어진 창 밖 나무들 사이로 갖가지 물상(物象)들이 한 눈에 드러나 보인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나무 밑동 둘레마다 가득 쌓인 가랑잎들이 뿌리로 다시 스며들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듯 몸을 돌돌 말아 움츠리고 있다. 은행나무 둘레엔 은행잎이, 단풍나무 둘레엔 단풍잎이, 감나무 둘레엔 감잎이, 그렇게 고여 있다가 바람 한번 불면 한 모다기로 섞이고 뭉쳐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참으로 많이도 뿌렸다. 이곳저곳에서, 여기저기에서,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대지를 몇 번이고 뒤덮고도 남을 만큼 나무들은 낙엽을 떨쳐내고 또 떨쳐내었다. 그리고 대지는 넉넉한 가슴으로 그 모든 것을 거두어 품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

올 가을에 생겨난 습관이 하루 가운데 틈틈이 캠퍼스 곳곳에 건초더미처럼 깔려있는 낙엽 위를 휠체어로 아주 천천히 지나가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뭇잎마다 반응하는 소리가 모두 다르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부터 ‘달그락달그락’ ‘쉬잇 쉿’, 심지어는 장작 타는 것 마냥 ‘타닥타닥’까지 갖가지 소리를 낸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랴! 바람에 날려 옷 위로 쌓이는 낙엽들을 굳이 털어버리지 않는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다.

아메리카원주민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로 부른다. 과연 11월은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곳곳에 잔잔한 기쁨을 안겨다주는 것들이 아직은 많기만 하다. 생명이란 얼마나 부지런한지, 조그마한 틈새에도 갖가지 집을 짓고 둥지를 틀고 씨를 뿌리며 생명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이 겨울로 넘어가며 더욱 또렷해지는 것은 그 틈새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해질녘 집으로 돌아오는데 대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온다. 사실로도 나는 어릴 적부터 하늘에 계신 하느님 이상으로 대지처럼 나를 품고 계시는 하느님을 더 실감하였었다. 대지의 영성이 살아있는 티베트나 인도, 아메리카원주민이나 켈틱 그리고 러시아 같은 곳에 한없이 매료되는 것도 그러해서였으리라.

   
▲사진/한상봉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다

그러기에 현대의 탁월한 전기 작가 발터 닉(Walter Nigg)이 <예언자적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 편’에서 이렇게 말한 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발터 닉
“기독교 내부에까지 스며든 종교를 불신하는 변형된 새로운 이교사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신에 대한 사랑의 시’라고까지 불리던 기독교 이전의 이교 사상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이교사상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이 안고 있는 그릇된 면보다는 진실한 측면이 더 높이 평가돼야만 한다.

이교사상은 대지와 결합돼 있다는 점에 그 진리가 있다. 이 진리가 바로 인식된 일이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지난 수십 년간 심한 곡해를 면치 못했으나 대지에 관한 진리는 우여곡절 끝에 열매를 맺기도 했고 또 고난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기독교가 이교사상의 진리를 자기 품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이교적 진리의 긍정적 측면만이 홀로 독립하여 근세의 역사가 가리켜 주는 바와 같이 기독교에 반항하는 세력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 진리를 기독교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영원히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귀중한 요소들을 주저 없이 내 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에 자기를 귀의시키기까지 하면서도 그렇다고 기독교를 소외시키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또한 그의 위대한 면이었다.

그는 훌륭한 방법으로 오히려 이 초시간적인 이단성을 기독교적 논리에 의하여 해명하려 하였으며, 이러한 줄기찬 노력에 의하여 향토의 흙에 대한 그의 관계는 퍽 명료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원시적 이교 사상과 복음의 내용을 융합함으로써 이 시인에게서는 오랜 지혜가 다시 되살아났으니, 그것은 즉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치하에서 순교했던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역시 내세적 희망만 이야기하는 자들은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질타하며, 니체의 “이제까지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가 가장 큰 죄였지만 지금은 대지를 모독하는 죄가 가장 끔찍한 죄다.”라는 말을 인용해 그리스도인들이 대지 곧 세상 속에 성실히 머물 수 있기를 마지막까지 간절히 호소했다.

하지만 지나간 2천년 교회사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놓쳐버린 영적 보물은 얼마나 많은가! “만약 기독교가 이교사상의 진리를 자기 품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이교적 진리의 긍정적 측면만이 홀로 독립하여 근세의 역사가 가리켜 주는 바와 같이 기독교에 반항하는 세력으로 자라날 것이다.”라는 앞의 글은 타당하다. 무엇이든 잘 먹는 아이가 잘 자란다고, 결국 성장(성숙)한다는 것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 편식을 모르는 수월함이 영성에서는 관용과 자비이다. 풍요로운 대지와 같은 관용과 자비로움을 지녀야 종교가 인류의 궁극적 일치 그 구원에 이바지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머물 수 있게 하라

   
▲생텍쥐페리
깊이가 사라져가는 교회, 무거움이 아니라 가벼움이 온통 휩쓸고 있는 교회, 근본을 꿰뚫는 통찰을 하지 못하는 교회, 내적 성찰이 아닌 형식주의가 큰 흐름인 교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린 교회, 무엇보다 하늘만 바라보다 세상에 대한 눈이 멀어버린 교회,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대지의 영성을 지닌 성인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가슴, 그리스도의 눈길, 그리스도의 손길, 그리스도의 음성을 다시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자석처럼 가벼운 쇳가루를 끌어 모으고, 블랙홀처럼 가벼움을 무거움으로 변화시키며, 교회에다 대지와 같이 탄탄한 중심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과 중심은 권력이 아니라 오직 가엾은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언제나 애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깊은 데로 가 그물을 쳐라!”는 말씀대로 그것이 깊이를 낳고, 깊어짐은 거룩하게 되는 길이니, 참으로 성화(聖化)는 심화(深化)이다. 그냥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둘레의 모든 것을 살려주는 대지의 한없이 겸손하고 고요한 거룩함이다. 이제 야단법석은 필요 없다. 야단법석은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가 대지가 되어야 할 때다. 세상 속으로 그리스도를 모셔갈 때다.

그리스도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머물 수 있게 하라. 그분의 음성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울려 퍼질 수 있게 하라. 그분의 가슴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불타게 하라. 그분의 눈길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곳곳에 닿게 하라.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 그럴 때 “대지는 우리들 자신의 대해 모든 책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오직 ‘성령’만이 진흙 위로 불며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그 처음과 마지막 구절은 마치 신앙고백문 같지 않은가.

정중규(‘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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