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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04 조회수472 추천수1 반대(0) 신고

대림 제2주일       2009년 12월 6일

  

루가 3, 1-6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알리면서, 그것이 역사적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를 정확하게 말합니다. 로마 황제 테베리오 치세 15년이고, 당시의 로마총독은 빌라도이며, 팔레스티나 영주 세 사람과 대사제들의 이름도 밝힙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면서도 당시의 로마 황제와 총독의 이름을 먼저 밝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건들 안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신화(神話)의 인물들이 아니라, 인류역사 안의 실제 인물이고, 그리스도 신앙은 그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 의례에 대한 유대교 당국의 요구는 엄하였습니다. 사람이 그 요구들을 온전히 수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절망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의례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실세인 사제와 율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앙부흥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람들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세례는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이 단순히 죄를 씻는 의례를 행하였던 반면,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회개, 곧 삶의 전환을 요구하였습니다.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참여하고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한 구원을 보았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정확히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었고, 그들은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요한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40,3-5)를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요한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준 예수의 길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려운 절차가 아닙니다.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는 회개입니다. 그 결심과 더불어 세례를 받으면, 죄가 용서된다는 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신앙을 왜곡하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 준수만을 강요한 나머지 사람들이 율법준수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바칠 것만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이 제물봉헌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준수를 하지 않는 사람과 제물봉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불행을 주어 보복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그 사실을 의식하며 사는 데에 필요한 생활지침이었습니다. 제물봉헌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산물을 보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얻은 것을 자기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은혜롭게 베푸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것을 보고 처리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얻은 것이 은혜로우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은혜로운 것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지키고 바칠 것만 강조하다가 율법과 제물봉헌의 참 뜻을 잊어버렸고, 동시에 그들은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안에 발생한 세례 운동은 그런 왜곡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폐해(弊害)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중들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포함된 아버지는 자녀에게 은혜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그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 사랑하신다, 용서하신다는 말은 그분의 자녀 된 사람은 그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이웃을 위해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은 우리의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알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실천이 있어서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있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일컬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인용한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을 빙자하여 의인과 죄인을 갈라놓고 사람을 차별하던 높은 사람들은 낮아지고, 그들로부터 무시당하던 낮은 골짜기, 곧 죄인들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으로 메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이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이웃에게 은혜로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내세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은혜로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웃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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