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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31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1 조회수491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성, 영성하고 있지만 영성이 뭐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성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얼(씨앗)로 생각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얼은 또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므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사랑 빼버리면 그야말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영성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주신 분은 뜻밖에도 공자와 맹자인 듯합니다. 공자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仁,義,禮,智로 알려주셨으며, 이러한 우리의 본성인 仁,義,禮,智는 마음으로,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므로 맹자는 인(仁)에서 발현되는 것은 측은지심, 의(義)에서 발현되는 것은 수오지심, 예(禮)에서 발현되는 것은 사양지심, 지(智)에서 발현되는 것은 시비지심이라 하여 이를 四端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이러한 仁,義,禮,智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깨어나라! 깨달아라! 말하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智가 있어야 합니다. 智가 있으면 저절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是非之心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智가 없는 사람에게 깨어나라! 깨달아라! 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智가 없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무지에서 벗어나면 몽매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고 하신 말씀은 개념이 없는 당시 민중들의 무지몽매한 상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피리를 분 것은 기쁜 소식인 복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곡은 슬픈 소식이므로 유대사회의 많은 병폐를 고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리를 부시고 곡을 하셨듯이 우리 그리스도교는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병폐를 고발하는 두 축이 조화를 이뤄야 함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지혜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시비지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지혜가 없는 사람은 편견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지몽매한 자의 편견은 자신의 이익만을, 그것도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생각할 것이므로 배만 부르게 해준다면 다른 것은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으므로 남이야 죽든 살든 관심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남이 슬퍼할 때 함께 울지 않으면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하지만 지혜가 없는 자에게서는 이를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혜는 시비지심으로 발현되는 것이므로 시비지심이 수반되지 않는 지혜는 지혜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는 말도 이런 맥락일 것입니다. 민중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속아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주시며 한편으로는 불의를 고발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仁,義,禮,智가 최고조로 발현된 모습이고, 예수님 자신의 안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므로 하느님과 하나 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먹지 않는다고 '마귀가 들렸다.’하였으며 예수님께는 '먹보요 술꾼이다'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대할 때마다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하며 지랄 발광했던 불과 얼마전의 우리 사회 모습들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이 무슨 말만하면 우리 언론들은, 언론이라는 명칭도 아깝지만 하여튼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하며 지랄발광을 하였으며, 이에 개념 없는 자들이 부화뇌동하며 온갖 험담으로 끝내는 죽음으로까지 내 몰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 그래도 지금의 '이래도 오케이, 저래도 오케이'보다는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은 국가권력에 제동이나 걸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언론과 주류세력들이 지랄을 떨었던 것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지랄을 떨었던 것이고, 비주류세력의 등장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득권 주류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으므로 주류 언론들은 유신 때와 전두환 정권 때처럼 '이래도 오케이, 저래도 오케이'하며 정권에 빌붙어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민중들은 오히려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있으므로 이런 현상은 강자에 빌붙어서 근근이 목숨이나 연명하려는 비굴한 노예근성이 아니면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개나 돼지처럼 배불리 먹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므로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오죽하면 비유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나 돼지로 비유하여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고 하셨겠습니까? 하느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하느님마저 왜곡시키며 자신들의 잇속이나 챙기고 있었으므로 뭔들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천 명이 모이고, 사천 명이 모인 것처럼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 복음에 의하면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말씀은 좌절을 느끼고 계시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중들이 적극 호응하였다면 이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그들에게 속고 있는 무지몽매한 자들로 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이럴 진데 하물며 이천년 전 유대민중들은 오죽하였을까를 묵상하면 예수님 대신에 바라빠를 선택한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가치보다는 강도를 선택한 이런 상황은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잠들어버린 저희들에게
그만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계속 자장가를 틀어주는 불의한 세력에 맞서
피리를 불고 곡을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주시옵고
저희도 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지혜의 성령님을 보내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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