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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찬례의 참뜻>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7 조회수1,434 추천수3 반대(0) 신고
번역한 책 교정하면서 좋아서 따다 붙입니다.  꼭 한 번 읽어주세요.
 
 
< 성찬례의 참뜻>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기억하고 - 감사드리고 - 나누고 - 몸 바쳐야 합니다


1. 해방을 기념하는 성찬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기로, 즉 타인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와 세계가 병들과 허약하고 초죽음이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1코린 11,26-28)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참조. 1코린 11,23-25)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성찬을 거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기억하다, 기념하다’(지카론, 아남네시스)라는 단어는 단순하게 떠올리는 것 이상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성찬을 알아듣게 해 주는 열쇠가 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백성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만 그 단어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업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려고 파스카 잔치를 거행했습니다. “그날 너희는 너희 아들에게, ‘이것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이란다.’ 하고 설명해 주어라.”(탈출 13,8) 계약을 다시 새롭게 하는 전례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해방을 언급하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경신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으로 만듭니다. 전례를 거행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하여 과거에 개입하여 보여주신 위대한 업적을 단순하게 기억하고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재현하고 새롭게 하고 현실화합니다. 하느님은 어제뿐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항상 당신 백성인 인류 역사 속에 개입하십니다. 전례를 거행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하여 어김없이 개입하신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끝날 까지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간청을 드립니다. 우리는 전례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계속 개입하여 주시라고 간청합니다. 따로 떨어진 세 가지 차원이 유일하고 항구한 총체성 안에 담깁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현재 안에 현실화하고 매래로 개방합니다.

그처럼 과거 사건을 현실화하여 항상 살아있게 하고 가능한 상태로서 미래로 개방하는 일이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에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탈출 12,14)

모임에서 백성은 하느님이 자기들을 위하여 무상으로(보답이 아닌 공으로) 이룩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 기념제는 가정에서(참조. 신명 6,20-25), 전례 모임에서(참조. 신명 26,1-11) 행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이 자기들을 선택하여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하고 광야에서는 만나로 먹이고 자유로운 땅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입니다. 즉 파스카입니다(참조. 신명 8,2.5.14-18).

그 목적은 과거를 잊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에서 유일하신 주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의 핵심 내용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다인의 파스카 전례에서는 가장이 포도주를 들고 이런 뜻으로 선언을 합니다. “이 붉은 포도주는 달고도 쓰던 우리네 삶을 뜻합니다. 억눌리던 시절에는 자유롭게 될 희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자유로운 시절에도 과거 노예살이하던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깨어 있으면서 해방의 길을 계속 달려가고 노예살이에 다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도록 해 줍니다. 이 기억과 기념은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며 실천적입니다.

유다교 지도자들이 파스카 축제를 공식화하고 경제적으로 이용하자, 그 축제는 단순한 예절주의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 전례적 형식주의의 유혹 앞에서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전례가 공허한 동작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이사 1,11)

호세아도 그와 똑같은 위험에 대하여 주의를 주고 주님의 이름으로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살리고 있습니다(참조. 마태 9,13).

성경의 원래 의미에서 기념한다는 것은 예절에 그치지 않고 사건화하고 생활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 사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역사 속에 놀랍게 공으로 주시는 은총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우심과 충실하심에로 개방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거행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희망하는 가운데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주님께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탈출 32,13)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충실하심은 그칠 줄을 모르고 미래로, 영원에로 열려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 당신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거행하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은 또한 과거에 대한 충실함은 다름 아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충실함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은 예수께서 말씀하고 행하신 모든 것을 떠올리는 공동체적인 행사입니다. 성찬을 거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 생애의 개별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전적으로 바치신 당신 생애 전체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끝까지 자기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성찬에서 기념하는 내용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현실로 변합니다(참조. 요한 14,26). 성찬의 거행은 ‘아남네세’(기억)과 ‘에피칼레세’(기원)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드디어 효과를 거둡니다.


2. 성찬의 거행은 불의한 상황에 도전합니다

억누름과 빼앗음과 불의가 판치는 사회 상황과 세계 상황에서 해방을 기념하는 성찬을 어느 정도로 정직하게 거행할 수 있을까요?

경제적으로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 상황 속에서 거행할 때 성찬의 나눔은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당신 일생과 목숨을 바치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몸을 바치고 피를 흘려서 불의와 불평등으로 갈라진 사람들을 일치시키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와 세계는 얼마나 갈가리 찢겨 있습니까?

성찬은 우리를 우리 자신 외부로 내몹니다. 물질적 음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 연대와 정의라는 거룩한 음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로 우리를 보냅니다. 소수 사람과 나라가 재화와 에너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소비하는 반면에 대다수 사람과 나라는 생존에 필요한 재화가 절대 부족하여 굶주리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세계와 인류의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거행하면서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나누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성경은 많은 대목에서 우리에게 쌓는 사람은 죽고 나누는 사람은 살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서 엘리야에게 마지막 양식을 나누어준 사렙타의 과부는 죽지 않고 삽니다(참조. 1열왕 17,7-16). 신약성경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나눔의 표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조. 사도 4,36-5,11).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본문에서는 예수님 시대에 사회가 무시하던 어린이로부터 출발하여 나눔의 교훈이 시작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알아듣기 어려운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알아들으려면 우리는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 나눌 줄 아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무시당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자기 아들에게 먹여야 할 음식을 병든 딸을 가진 가난한 이웃에게 먼저 나누어줄 줄 아는 어머니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성찬은 재화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처럼 당신 자신(몸과 피)을 타인과 인류를 위하여 바치고 나누어주도록 촉구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철저하게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성찬을 생활화하여 나날의 삶 속에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빵을 들고 하늘로 눈을 들어 아버지께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는 순간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경제의 빵을 빼앗아 모든 사람이 서로 위해주면서 따뜻하게 나누는 거룩한 빵이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감사하는 행위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역사를 건설하는 일에 몸 바치는 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표양으로 남겨주신 가장 큰 성찬의 의미입니다(참조. 요한 13,1-20).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1ㄴ-15). 우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면서 섬길 때에만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서 살 수 있습니다(요한 13,8). 우리는 형제자매인 다른 모든 사람을 철저하게 사랑하고 그들과 연대할 때에만 효과적으로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3.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위하여

몸 바치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이자 선물입니다

성찬을 거행하는 목적은 우선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성찬을 거행하는 목적은 또한 하느님과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몸 바치는 데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성찬을 거행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야 하는 음식의 정의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기 위하여 모인 모든 사람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형제애와 인간존엄성을 짓밟는 사회불의를 제거하려는 열망과 노력이 없이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형제자매인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1요한 4,20).

요한 크리소스톰은 성찬의 의미가 궁핍한 형제들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주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강력한 촉구로 들립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경배하고 싶다면 헐벗은 사람을 만날 때 그를 소홀히 대하지 마십시오.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소홀히 대하지 않기 위해 여기 교회 안에서는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을 경배하지 마십시오. ‘이는 내 몸이니라.’고 하신 분이 또한 ‘너희는 내가 굶주리는 것을 보고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은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고 하십니다.”

제단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겉옷이 아니라 순결한 영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현자들처럼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경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밥상에 금잔이 가득 놓여 있을지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목말라하고 굶주리는 그리스도께 물과 밥을 드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단과 제의를 금실로 꾸밀지라도 헐벗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옷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고통당하는 형제자매들을 잊지 않을 때 성전과 성찬은 금보다 더 귀중해질 것입니다.

성찬은 모든 사람이 한 밥상에 앉아 음식을 골고루 나누는 축제입니다. 쌓아 두는 일도 없고 부족함도 없게 하는 축제입니다.

온 인류가 한 밥상에 앉아 새로운 파스카를 거행할 때 모든 백성이 알렐루야를 노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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