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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0 조회수742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would be fulfilled.
(Lk.1.45)
 
제1독서 미카 5,1-4ㄱ
제2독서 히브리서 10,5-10
복음 루카 1,39-45
 
 
어떤 형제님께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탤런트의 미모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이 형제님이 아내가 그 말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에요. 남편이 못생긴 자기를 빗대 놓고 하는 말같이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차갑게 쏘아붙였습니다.

“그렇게 예쁘면 그 애랑 살아.”

남편이 아내가 예쁘지 않다고 말했습니까? 그렇다면 저렇게 예쁜 여자랑 살고 싶다고 말을 했습니까? 모두 아니지요. 스스로의 얼굴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그 말이 꼭 자신을 빗대어 놓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열등감을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워 보이는 탤런트들 역시 이렇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성형 수술을 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각종 화장과 옷으로 자신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열등감 외에도 내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열등감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많은 고민과 상처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고민과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따뜻한 위로가 우리의 고민과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성모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엘리사벳이 살고 있었던 에인카렘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요. 더군다나 성모님께서는 홀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셨을까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다는 것, 더군다나 이 아기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것,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을 당시 15세의 나이였던 성모님께서 받아내기에는 너무나 큰 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던 것이지요.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을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치심으로 위로와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전해주십니다.

엘리사벳의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이웃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위로와 힘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위로와 힘보다는 상처와 아픔을 전해 주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힘들어하고 지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힘들고 지쳐있는 사람,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로와 힘을 전해 주는 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전해 주는 이가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을 닮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대림초의 불도 모두 다 켜졌고, 이를 통해 예수님의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남은 시간을 더욱 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위로와 힘을 전해 주는 사람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전해 주는 사람만이 예수님 맞이할 준비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친절한 행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헛되지 않다(아이소푸스).



자신을 낮은 곳에 두자(짱쩐슈에, ‘나를 낮추면 성공한다’ 중에서)

일상에서 느끼는 갖가지 괴로움으로 마음 깊은 곳에 불만이 가득해 힘들어하던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여름날, 그는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아버지에게 큰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늙은 어부였는데, 젊은이는 그의 담담하고 침착한 태도가 너무나 부러웠다. 젊은이가 물었다. “하루에 고기를 얼마나 잡으세요?” 그가 대답했다. “허허, 이보게! 고기를 얼마나 잡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네. 그저 빈손으로 돌아오지만 않으면 되지. 우리 아들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비를 제때 내야 한다는 생각에 늘 고기를 많이 잡으려고 했어. 그러나 공부를 마친 지금은 지나치게 욕심 부리지 않는다네.”

젊은이는 생각에 잠긴 듯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부는 바다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젊은이의 물음에 어부가 말했다.

“바다? 너무나 위대하지. 수없이 많은 생명을 키워 내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는 젊은이에게 다시 물었다. “자네, 바다가 왜 그리 위대한지 아는가?” 젊은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바다가 그렇게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네.”

그렇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었다. 어부 역시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었기에 그리도 담담하게 일상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그마한 성공에도 금세 우쭐대며 마치 자기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지 말자. 자신을 좀 더 낮추고 착실하게 단계를 밟아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해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Apres Un Reve - Masaji wata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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