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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마음이 병든 사람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1 조회수700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코 3:1-6).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34년 간을 의원으로 지낸 미국의 팁 오닐(Tip O’Neil) 전 하원의장의 사무실 벽에는 험프리(Hebert Humphrey) 부통령이 한 연설문이 붙어 있었다.
“정부의 도덕성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판가름 납니다.
인생의 여명기인 어린이를, 인생의 황혼기인 노인을, 인생의 그늘에 있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과 장애자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판가름 납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셔(Portia)는 판사로 변장하여 법정에 나타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Shylock)에게 하는 명연설을 했다.
자비심은 강요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네.
그건 단비처럼 하늘에서 땅 위에 떨어지는 것으로, 이중(二重)의 축복이 내린다네.
자비심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다 같이 축복을 받게 한다네.
그리하여 가장 힘 있는 자에게서 최상의 힘을 발휘하게 만든다네.
옥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는 왕관보다 자비심이 더 어울린다네
.
그의 왕홀(王笏)은 무상한 권력과 경외와 존엄성을 상징하며 왕을 두려워하게 만들지만 자비심은 이 왕홀의 위력보다 더 강하다네
.
왕의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비심은 하느님 자신의 특성이기도 하다네.

정의 안에서 자비심이 드러날 때, 이 땅의 권세는 하느님의 권세에 가장 가까워진다네.
그러니, 유태인이여, 그대는 정의라고 변명하지만, 잘 생각해 보게.
정의를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아무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네.
우리가 자비심을 달라고 기도 드리면 바로 그 기도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가르쳐 준다네.
 
험프리 부통령과 셰익스피어는 자비심의 위력에 대하여 말했다. 측은지심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과연 왕다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었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은 어려웠다. 바리사이들이 그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가 말했다.
그는 손만 오그라들었지만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병들어 오그라져있었습니다.그리하여 그들은 장애자를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시는 분에 대해서도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속 깊이 있는 악을 보셨기 때문에 그들을 순화시키기 위해 먼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먼저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인가?’하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아마 ‘당신은 율법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있소.’하고 답했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손수 안식일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 방법 외에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이 없다.”고 그들에게 율법에 담긴 뜻을 설명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도 구제해주었습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나 나귀에게도 적용하여 구제해주었습니다.(마태오 12:11)
이렇게 율법은 편의에 맞게 되어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점을 꼬집어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은 기분이 언짢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라고 답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을 보기 어려운데 오늘 복음에서는 화를 내시고 계신다. 다른 한 번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낼 때였다.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내신 것이다.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과 논쟁을 벌여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화를 내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어쩔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아를 버리라고 하신 것은 아집으로 소리치고 주장하기를 그만두라는 뜻이다. 그런데 늙어갈수록 옹고집이 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반항 같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다. “선한 사람의 사랑이나 거룩한 자비에서 생기는 분노도 악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악은 덕(德)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노와 같은 감정이 정당한 것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병이라든지 좋지 않은 격정이라고 감히 말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아무 죄도 없이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서는 이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을 취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간적인 감정을 숨기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율법 해석자들은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슬퍼하시거나 화를 내시는 장면이 나올 때에는 무분별하셔서 그렇게 하셨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깊은 뜻을 찾지 못한다면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네.”(<위대한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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