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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께서 다시 호수가에서'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7 조회수454 추천수2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마르 4,1-20)

 -유광수 신부-

장은
"비유의 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4장 전체가 비유에 관한 말씀이다. 
우선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4장의 비유들은 초기에 예수님의 활동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4)고 선포하신 이후에 어부 네 사람을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나병환자, 중풍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오그라든 손을 펴 주시는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사방팔방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초기 활동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마르 3, 2),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를 모의하였다.(마르 3, 6) 또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마르 3, 21)는 소문을 듣고 붙들러 나섰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 3, 22)고도 하고 또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였다.

 

 한편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은 어떤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 6) 라는 말씀이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라는 예수님의 탄식 그리고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르 9, 19)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초기 활동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부작용과 반대세력에 부딪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상황으로 전개되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들으려는 것보다는 병을 고치는 기적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는 복음을 선포하신 이후 나타나고 있는 그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전교 방법도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새로운 방법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말이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교수방법을 바꾸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의 신앙생활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공동체와 교회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도 말씀으로 돌아오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시는 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상처 받은 우리들의 영혼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이 바로 4장의 가르침 속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읽고 또 읽으면서 깊이깊이 묵상할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예수님은 일단 군중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배에 오르신다. 호수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을 가리킨다."고 했고 예수님께서 올라앉으신 배는 교회를 말한다.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라는 것은 예수님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예수님이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신 내용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마치 임금이 어떤 중대한 내용을 선포하기 위해 옥좌에 앉으시고 문무대신들은 그 앞에 정렬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엄숙하고 긴장이 감도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셔서 가르치셨듯이" 오늘도 교회라는 배에 앉으셔서 가르치신다. 교회는 매일매일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도록 다양한 성서 강의가 마련되어야 한다. 매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복음과 강론뿐 아니라 아침, 낮, 저녁에도 삶의 현장에서 지친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복음을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해야할 사명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비유로 가르칠 때는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비유로 가르칠 때는 가르치는 내용을 상대방이 좀더 알아듣기 쉽게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을 사실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오해를 받게 되거나, 아니면 어떤 피해를 입게 될 때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또 비유는 직설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시는 내용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성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복음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기에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의 참 뜻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듯이"(마르 4, 10) 물어야 한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마리아도 천사의 인사를 받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 1, 29)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을 통해서 그 뜻을 알아들을 때 비로서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사람"(마르 4, 9)이 될 것이다. 

 

아무튼 오늘 복음은 내가 왜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가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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