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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33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9 조회수772 추천수9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I. 삼위일체

 

1. 성부

D. 하늘과 땅 (원죄)

d. 성욕

 

유혹자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죄책감에 서로 부끄러워하기 시작합니다. 한 몸일 때는 부끄러운 몰랐지만 죄를 지으니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알몸이라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왜 자신들이 알몸이었던 것을 몰랐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죄를 통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부부관계를 갖는다면 죄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는 부부관계가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부끄러운 관계를 통해 태어나는 자녀들도 부모의 죄를 이어받게 되는데 이것이 ‘원죄’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성욕을 갖고 태어납니다. 동물은 죄가 없기 때문에 성욕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이렇게 교만에 이어 두 번째 죄의 뿌리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뿌리박있는 죄의 뿌리는 교만이고 그 죄로 인하여 육체는 또 다른 부끄러움을 느끼는 죄의 뿌리인 ‘성욕’을 평생 지니고 살게 된 것입니다.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야훼계 문헌의 특징입니다. 엘로힘계 문헌에 표현된 하느님은 만나기 어려운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인간에게 있어 본래의 하느님은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정한 존재이셨는데 죄를 지은 이후에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이 무서워서 숨게 됩니다. 그러인간들이 나무 뒤로 숨는다고 못 보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단지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죄를 짓고 하느님을 멀리하게 된 것이 하느님의 탓이 아닌 죄를 범한 인간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성당에 나와 고해를 하고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돌아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더 하느님을 멀리하고 냉담하게 됩니다.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하느님도 인간도 두렵고 미워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두려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스스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멀리하게 됨으로써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찾으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숨어버리려고 하는 것하느님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인간입니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이젠 참다운 사람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죄를 짓고 실수하는 것에 대해 인간적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인간의 모습은 죄를 짓지 않았던 상태였고 지금 우리 모두의 모습은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님을 참 인간으로 사람들 앞에 내세웁니다.

 

요한 19장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 성경에는 ‘자, 이 사람이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로는‘ivdou. o` a;nqrwpoj’, 즉 ‘보아라, 여기 (이, 한) 사람이 있다.’, 라틴어로는 ‘Ecce Homo즉, ‘여기 사람이 있다.’입니다. 가시나무 관과 임금의 상징인 자주색 옷을 걸치고 매를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참다운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의 몰골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그 모습이 ‘참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완전히 죽일 때 ‘참다운 인간’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의 그 ‘사람의 모습’을 지금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알몸’을 드러내기가 이젠 ‘부끄러운 것’을 넘어서 ‘두려워’졌습니다. 부끄러운 일인지를 알고 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진다는 것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 3장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인간 자신이 알몸임을 알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원인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에서 온 것임을 하느님께서는 금방 아십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를 두려워하고 슬금슬금 숨으려고 한다면 무언가 잘못을 질렀음을 부모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죄의 성립 요건에 있어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죄를 짓고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어떠한 잘못에 대해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려고 하더라도 양심은 그것이 죄임을 말해주고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면 당당히 나서서 하느님께 찬미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냉담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느님을 피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12 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를 지은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따라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며, 급기야는 서로에게 탓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남에게 탓을 돌린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죄가 성립되어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죄의 결정적 요인은 남의 유혹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입니다. 책임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책임도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탓을 많이 하는 이들은 그만큼 죄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죄를 짓도록 자신에게 여자를 만들어준 하느님을 원망하고 그 여자도 원망합니다.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여자는 유혹자를 원망합니다. 유혹에 걸려 넘어진 것은 자신인데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으려 했다면 인간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짓는 죄란 없습니다.

 

자신의 책임은 회피한 채 상대에게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도 사라져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자신이 참 하느님을 버리고 하느님의 위치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교만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의 관계, 즉 종적인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즉 횡적인 관계가 모두 단절되게 된 것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십자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분의 희생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어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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