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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 4주일 - 보는 방법 (유승학 신부님) / [복음과 묵상]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30 조회수507 추천수2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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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연중 제 4주일  보는 방법
(유승학 신부님)


언젠가 다급하게 병자성사를 청하는 상기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왔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 듯 싶어 병자성사 가방을 들고 다급하게 병원으로 움직였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 할머니가 산소 호흡기를 차고 조용히 누워계셨고 그 옆엔 가족들이 그분의 임종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으로 있었다. 왠지 다급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른 영대를 착용하고 병자성사를 드렸다.
그 후 전화를 준 아드님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종종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신부님을 모셔와서 병자성사를 꼭 받게 해달라는 말씀을 유언처럼 누누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나마 의식은 없으셨지만 숨을 쉬시며 살아계셨던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드린지 몇 분도 채 안되어서 숨을 거두신 것이다. 순간 ‘기다리셨구나!’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났다. 의식이 없으시고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애타게 기다렸던 하느님의 은총의 따스함을 병자성사를 통해서 느끼셨던 것이다.

그 할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이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 할머니는 의식도 없고, 볼 수도 없었으며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을 텐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삶의 마지막을 놓으실 수 있었을까? 아마도 필자가 생각하기엔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또 다른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신앙으로 형성된 영적인 눈으로 그 모든 것을 기다렸고 보았으며 바라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사실 본다고 하지만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하지만 사실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종종 생각해 본다. 어쩌면 ‘본다’하지만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닐 수 있고 ‘안다’ 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를 통해 알게되는 ‘봄’, ‘느낌’, 그래서 얻어지는 ‘앎’은 분명 그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또한 대부분 주관적인 사고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대를 받지 못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안다’고 하는 예수님은 과거 고향에서 생활했던 평범한 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동안의 기적에 대한 소문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고향에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육체의 눈에 보여진 것과 경험된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과 사건의 내면의 감춰진 또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형성된 주관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예수님께 감춰진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전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얼마나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사랑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영적인 것은 우리의 인간의 모든 감각의 한계, 지식의 한계를 떠나 볼 수 있는 영역이다.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이지만 전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예수님과 이웃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1월 31일] 거룩하신 생명의 말씀 '복음' 
<루카 4,21-30>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오셔서 설교하십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출신을 떠올리고는 능력을 의심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 동네에서 목수 일 하던 그 사람의 아들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예수님의 본모습에 다가가는 데에 실패합니다.
그들은 기적의 주님을 만나고 접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수의 아들이란 생각 때문에 ‘기적의 힘’을 깨닫지 못합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한쪽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에만 매달리다가 그분의 영적 모습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은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벌주거나 징계를 가하기 위한 기적은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편견을 뚫지 못하는 믿음을 애석하게 여기셨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기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숨 쉬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렇건만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주셨기에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편견’을 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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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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