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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원판 불변의 법칙(?)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31 조회수990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4 주일: 원판 불변의 법칙(?)

 

 

 

몇 년 전에 한 번 술을 끊은 적이 있었는데 전화해서 아버지께 술을 끊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믿지 않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술 끊었으면 나도 끊겠다.”

아버지께서도 술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는 절대 못 끊는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8개월 정도 끊었다가 못 참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들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은 안 바뀐다는 조금은 비관적인 목소리입니다. 이는 아마도 바뀌기를 기대했던 어떤 사람이 끝끝내 자신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아서 실망하였고 또 그런 실망들이 반복되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는 또 “난 그렇게 생겨먹었어!” 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바꾸는데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번 소년원에 가서 학생들 고해성사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중학생이었는데 때려서 친구를 죽게 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소년원에 들어와서 종교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상대로 그 아이들 대부분은 가정환경이 안 좋게 성장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중 한 분이 안 계시거나 두 분 다 안 계셔서 사랑해주고 돌봐줄 사람이 없이 컸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자랐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판 불변의 법칙은 어쩌면 매우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원판 불변의 법칙을 거슬렀던 많은 예들이 나옵니다.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든 죄인이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성녀 중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몸을 파는 사람들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판도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처음에 그리스도교 사람들을 잡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악독한 사람이 이방인의 최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빈 라덴이 비오 성인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오로가 변화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님을 받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바오로의 원판도 하느님을 만나면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예수님이 뜬금없이 당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시는 것을 듣고 '목수 요셉의 아들이 미쳤나?' 생각합니다.

몇 달간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동네 총각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년 동안 멀쩡히 살았는데 갑자기 집 뛰쳐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이상한 말만 해 대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자렛 사람들은 원판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가 예언자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믿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엘리야와 나아만의 예를 들며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하느님의 예언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삼년 반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셨는데 그 때 엘리야는 시돈지방, 즉 이방인 지방 어느 과붓집에 피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장수였는데 문둥병에 걸렸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녀의 말을 듣고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를 찾아왔었습니다. 엘리사는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나아만에게 사람을 보내어 요르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처음엔 기분 나빠하다가 나중엔 요르단 강에 들어가 문둥병을 깨끗이 고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한 분 뿐임을 깨닫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서 환영받지 못하였고 이방인들에게 복이 돌아갔듯이 지금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똑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분이 치민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뚫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예언자는 비수 같은 말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언자는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떠나면 그들은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것을 떠난 뒤에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주신 두 예언자는 비유를 넘어서 하나의 예언이 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였지만 이사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엘리야까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었고 이방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죽이려 하지만 조금 있다가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엘리야가 이방 마을로 갔던 것처럼, 또 지금처럼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시던 것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이스라엘을 떠나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결과는 무엇입니까?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았듯이 예수님께서 떠나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성령의 생명수가 떨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있던 과부의 집에서는 빵,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 또 기름, 즉 성령님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일 보던 요르단 강에 그것도 일곱 번이나 자신을 담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나아만은 결국 예언자가 보낸 이의 말을 믿고 문둥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요르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일곱 가지 방법인 칠성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 그 은총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였지만 이방인들은 마치 엘리사가 보낸 사람만 보고도 나아만이 그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의 말만 듣고도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갔던 시돈, 즉 사렙다 마을이 바로 바티칸이고 나아만이 들어갔던 요르단 강 물이 바로 칠성사가 행해지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풀무 불에서 방금 나온 시뻘건 쇳덩어리와 같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머리까지도 물컹물컹하다고 합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기 때의 교육이 평생을 갑니다. 그 때 낫을 만들 것인지 호미를 만들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굽혀놓으면 점점 굳어져서 다시 그 모양을 바꾸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모양이 잘 못 잡힌 아이들은 커가면서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크게 바뀔 수가 없게 됩니다. 점점 열기가 식어가면서 겉만을 더 날카롭게 혹은 덜 날카롭게 다듬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바오로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뜨거운 불로 제자들에게 내려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180도 바꾸어서 용맹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만드셨습니다. 낫이 호미가 되고 호미가 삽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다시 녹여서 처음부터 새로 만들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확 바뀔 수 있으려면 성령의 불 안에 들어가 꼼짝 말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가 회개를 한 것도, 막달레나가 회개를 한 것도, 소년원의 아이들이 고해성사를 눈물로써 보는 것도 이 변화를 믿지 못한다면 나자렛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남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어!', '난 원래 그래!'. 이런 말들은 이제 천주교 신자라면 하면 안 됩니다. 정해져서 못 바꾸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성령의 풀무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얼마든지 새로 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변화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대장장이이십니다. 성령의 불로 우리를 녹여서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 전엔 어떤 모양이었든지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의지입니다.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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