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날마다 좋은 날" - 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07 조회수409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2.7 연중 제5주일                                              
이사6,1-2ㄴ.3-8 1코린15,1-11 루카5,1-11
 
 
 

                                                            
 
 
"날마다 좋은 날"
 
 


새벽 성도일도 초대 송 후렴이
오늘 따라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

매일 이 거룩한 성전, 하느님 앞에서,
구원의 바위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사람들이 있건 없건, 누가 보건 말건
사람들 앞에서가 아닌 하느님 앞에서
정성껏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우리 수도승들의 종신 서원 식 때 서원장의 서두 말씀도 생각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    )교구 (   )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   )수사 저는
  하느님과 성인들 앞에서‧…서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하느님과 성인들 앞에서
평생 서원에 충실할 것을 약속한 수도승들입니다.
 
지금 우리 역시 성전 안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머물수록 참 내가 됩니다.
 
하느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하느님 앞을 떠나 참 나를 잃고 사는 이들 얼마나 많은지요.
 
성전에서 공동전례에 참석 시,
기도나 묵상 시
꼭 ‘하느님 앞에서’ 임을 의식하고 자신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가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참 나되어 살 수 있었을까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앞에서 살게 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아 올린 베드로와 그 일행들입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지금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내 삶의 자리 어디나 깊은 데이며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의 자리에 충실하며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그 일행은 그들의 삶의 자리,
일터인 호수 깊은 데에서 주님을 만났고,
이사야는 그 삶의 자리인 성전 깊은 데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들 자기 삶의 자리에 충실하면서
내면 깊이에서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서도 이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주님만을 찾으며 우리 삶의 자리에 충실할 때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이며 주님은 이런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백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리하면 온 세상의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나리라.

며칠 전 접하고 참 기뻐했던 불가의 귀한 말씀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활짝 열린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높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탁 트인 전망과도 같고
캄캄한 밤, 밤샘 기도 후 새벽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할 때의 환희 심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의 내적 경지를,
우리로 말하면 하느님과 빛나는 만남을 뜻합니다.
 
제자리 깊은 데서 충실하며 간절히
주님을 찾던 이사야 마침내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친히 찾아 오셔서 이사야의 눈을 열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만난 이사야의 저절로 터져 나온 고백입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주님의 거울에 죄인으로 드러난 참 나의 모습에 기겁하는 이사야입니다.
 
이런 체험이 참 겸손에 이르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참 모습의 나입니다.
하느님을 뵈면서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참 나를 본 이사야입니다.
 
주님은 즉시 이사야를 깨끗이 해 줍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바로 주님의 타는 숯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주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주님은 당신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의 죄악을 깨끗이 없애 주십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정화 되어 깨끗한 사람으로 새로 나는 이사야요
미사 참석 중인 우리들입니다.
 
새삼 참 겸손은 주님과의 만남의 열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역시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인으로서의 나를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 주셔서 당신을 보게 하십니다.
 
주님을 만날 때 죄인으로서의 참 나를 발견하며
겸손에,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하느님의 은총이라 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하느님 은총의 산물로 고백하는 겸손한 바오로입니다.
 
모두 주님과의 만남의 열매들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은총의 열매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계속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
참 나를 형성해 줍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요, 매순간 진실하라.

이 또한 제가 좋아하는 불가의 말씀으로
깨달은 자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어디에서든 주님께 파견 받은 자로서
종이 아닌 주님의 자녀로서
주인처럼 당당히 매순간 진실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만남 후의 이사야,
바오로, 베드로의 삶이 다 이러했고 모든 성인성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말 그대로 대 자유인의 행복한 삶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주님을 만나 은총으로 충만한 이사야의 거침없는 대답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제 삶의 자리에 안주하라 만나 주신 게 아니라
당신의 도구로 파견하시기 위해 만나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언제어디서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게 된 이사야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만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삶,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의 힘과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 삶의 자리 ‘깊은 데’로 파견하십니다.

1.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을 사십시오.
                         어디나 깊은 데 좋은 날, 좋은 곳입니다.

2.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믿음의 용기로 백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온 세상의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 얼굴이 우리를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3.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 되어 매순간 진실하게 사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시며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멘.



 
 
 
 
 
 
 
 
 
 
 
 
 
 
 
 
 
 
 
 
 
 
 
 
 
 
 
 
 
 
 
 
 
 
 
 
2010.2.7 연중 제5주일                                              이사6,1-2ㄴ.3-8 1코린15,1-11 루카5,1-11

                                                             날마다 좋은 날

새벽 성도일도 초대 송 후렴이 오늘 따라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
매일 이 거룩한 성전, 하느님 앞에서, 구원의 바위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사람들이 있건 없건, 누가 보건 말건 사람들 앞에서가 아닌 하느님 앞에서 정성껏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우리 수도승들의 종신 서원 식 때 서원장의 서두 말씀도 생각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    )교구 (   )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   )수사 저는 하느님과 성인들 앞에서‧…서원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하느님과 성인들 앞에서 평생 서원에 충실할 것을 약속한 수도승들입니다. 지금 우리 역시 성전 안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머물수록 참 내가 됩니다. 하느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하느님 앞을 떠나 참 나를 잃고 사는 이들 얼마나 많은지요.
성전에서 공동전례에 참석 시, 기도나 묵상 시 꼭 ‘하느님 앞에서’ 임을 의식하고 자신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가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참 나되어 살 수 있었을까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앞에서 살게 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아 올린 베드로와 그 일행들입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지금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내 삶의 자리 어디나 깊은 데이며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의 자리에 충실하며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그 일행은 그들의 삶의 자리, 일터인 호수 깊은 데에서 주님을 만났고, 이사야는 그 삶의 자리인 성전 깊은 데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들 자기 삶의 자리에 충실하면서 내면 깊이에서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서도 이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주님만을 찾으며 우리 삶의 자리에 충실할 때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이며 주님은 이런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백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리하면 온 세상의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나리라. -
며칠 전 접하고 참 기뻐했던 불가의 귀한 말씀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활짝 열린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높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탁 트인 전망과도 같고 캄캄한 밤, 밤샘 기도 후 새벽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할 때의 환희 심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의 내적 경지를, 우리로 말하면 하느님과 빛나는 만남을 뜻합니다. 제자리 깊은 데서 충실하며 간절히 주님을 찾던 이사야 마침내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친히 찾아 오셔서 이사야의 눈을 열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만난 이사야의 저절로 터져 나온 고백입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주님의 거울에 죄인으로 드러난 참 나의 모습에 기겁하는 이사야입니다. 이런 체험이 참 겸손에 이르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참 모습의 나입니다. 하느님을 뵈면서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참 나를 본 이사야입니다. 주님은 즉시 이사야를 깨끗이 해 줍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바로 주님의 타는 숯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주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주님은 당신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의 죄악을 깨끗이 없애 주십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정화 되어 깨끗한 사람으로 새로 나는 이사야요 미사 참석 중인 우리들입니다. 새삼 참 겸손은 주님과의 만남의 열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역시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인으로서의 나를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 주셔서 당신을 보게 하십니다. 주님을 만날 때 죄인으로서의 참 나를 발견하며 겸손에,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하느님의 은총이라 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하느님 은총의 산물로 고백하는 겸손한 바오로입니다. 모두 주님과의 만남의 열매들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은총의 열매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계속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 참 나를 형성해 줍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요, 매순간 진실하라.
이 또한 제가 좋아하는 불가의 말씀으로 깨달은 자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어디에서든 주님께 파견 받은 자로서 종이 아닌 주님의 자녀로서 주인처럼 당당히 매순간 진실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만남 후의 이사야, 바오로, 베드로의 삶이 다 이러했고 모든 성인성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말 그대로 대 자유인의 행복한 삶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주님을 만나 은총으로 충만한 이사야의 거침없는 대답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제 삶의 자리에 안주하라 만나 주신 게 아니라 당신의 도구로 파견하시기 위해 만나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언제어디서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게 된 이사야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만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삶,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의 힘과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 삶의 자리 ‘깊은 데’로 파견하십니다.
1.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을 사십시오. 어디나 깊은 데 좋은 날, 좋은 곳입니다.
2.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믿음의 용기로 백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온 세상의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 얼굴이 우리를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3.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 되어 매순간 진실하게 사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시며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하느님과 성인들 앞에서 평생 서원에 충실할 것을 약속한 수도승들입니다. 지금 우리 역시 성전 안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머물수록 참 내가 됩니다. 하느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하느님 앞을 떠나 참 나를 잃고 사는 이들 얼마나 많은지요.
성전에서 공동전례에 참석 시, 기도나 묵상 시 꼭 ‘하느님 앞에서’ 임을 의식하고 자신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가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참 나되어 살 수 있었을까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앞에서 살게 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아 올린 베드로와 그 일행들입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지금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내 삶의 자리 어디나 깊은 데이며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의 자리에 충실하며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그 일행은 그들의 삶의 자리, 일터인 호수 깊은 데에서 주님을 만났고, 이사야는 그 삶의 자리인 성전 깊은 데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들 자기 삶의 자리에 충실하면서 내면 깊이에서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서도 이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주님만을 찾으며 우리 삶의 자리에 충실할 때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이며 주님은 이런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백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리하면 온 세상의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나리라. -
며칠 전 접하고 참 기뻐했던 불가의 귀한 말씀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활짝 열린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높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탁 트인 전망과도 같고 캄캄한 밤, 밤샘 기도 후 새벽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할 때의 환희 심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의 내적 경지를, 우리로 말하면 하느님과 빛나는 만남을 뜻합니다. 제자리 깊은 데서 충실하며 간절히 주님을 찾던 이사야 마침내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친히 찾아 오셔서 이사야의 눈을 열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만난 이사야의 저절로 터져 나온 고백입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주님의 거울에 죄인으로 드러난 참 나의 모습에 기겁하는 이사야입니다. 이런 체험이 참 겸손에 이르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참 모습의 나입니다. 하느님을 뵈면서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참 나를 본 이사야입니다. 주님은 즉시 이사야를 깨끗이 해 줍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바로 주님의 타는 숯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주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주님은 당신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의 죄악을 깨끗이 없애 주십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정화 되어 깨끗한 사람으로 새로 나는 이사야요 미사 참석 중인 우리들입니다. 새삼 참 겸손은 주님과의 만남의 열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역시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인으로서의 나를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 주셔서 당신을 보게 하십니다. 주님을 만날 때 죄인으로서의 참 나를 발견하며 겸손에,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하느님의 은총이라 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하느님 은총의 산물로 고백하는 겸손한 바오로입니다. 모두 주님과의 만남의 열매들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은총의 열매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계속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 참 나를 형성해 줍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요, 매순간 진실하라.
이 또한 제가 좋아하는 불가의 말씀으로 깨달은 자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어디에서든 주님께 파견 받은 자로서 종이 아닌 주님의 자녀로서 주인처럼 당당히 매순간 진실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만남 후의 이사야, 바오로, 베드로의 삶이 다 이러했고 모든 성인성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말 그대로 대 자유인의 행복한 삶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주님을 만나 은총으로 충만한 이사야의 거침없는 대답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제 삶의 자리에 안주하라 만나 주신 게 아니라 당신의 도구로 파견하시기 위해 만나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언제어디서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게 된 이사야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만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삶,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의 힘과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 삶의 자리 ‘깊은 데’로 파견하십니다.
1.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을 사십시오. 어디나 깊은 데 좋은 날, 좋은 곳입니다.
2.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믿음의 용기로 백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온 세상의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 얼굴이 우리를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3.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 되어 매순간 진실하게 사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시며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