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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76)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22 조회수398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0년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베드로 1서 5,1-4; 마태오16,13-19 -
 
(476) 제 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이순의
 
사순절이 시작 되면서 결심한 것이 있다. 그 중에 묵상글을 쓰는 것도 포함 되어 있는데,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묵상글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소모시킨다.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며 결심해야하는데 그 마지막에서는 이런 결과가 어떻게 복음정신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그러니 한동안 뜸했던 필력을 끌어 온다는 것도 어렵지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연상들 또한 두서가 없다. 전에는 메모 한 줄이면 소설 같은 묵상글이 써 졌는데 이제는 메모는커녕 줄거리를 써서 제공을 해도 그 맥락이 뒤숭숭하다. 그래도 결심했으니......... 써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매일 한 편을 쓸지 아니면 생각 날 때 가끔 한 편을 쓸지도 고민이었다. 그런데 재의 수요일 후 금요일에 첫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는데 응답이 섰다. 2010년 사순 기간 동안에 열네 편의 묵상글을 쓰기로! 결과에 대해서는 더 쓸지 아니면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끝날지는 모르지만 십자가의 길 14처면 무난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첫 묵상글을 쓴다.
 
제1처가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하란다.
전에는 제1처 앞에 서면 내가 누구에게 사형선고를 할지에 대하여는 그다지 묵상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형선고 받을지에 대하여 기꺼이 받겠다고 어떠한 선고라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라고 쉼 없이 "예" 라고 답했던 것 같다. 그것이 주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의지였을 것이고, 혹시 어려운 삶에라도 봉착하게 되면 주님의 사형선고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었던 길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도 받으셨으니 나도 받겠다는 입장에서 일 것이다. 그 가해자가 나라는 입장인데도 주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입장이시니 내 입장도 사형선고를 받는 입장에서 더 근접한 동질성을 확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려는 중년의 입장은 내가 앞으로 사형선고를 할 입장도 없고, 사형선고를 당할 입장도 서지를 않았다. 앞으로 그려질 죄가 아니라 지난 세월에서 나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하면, 나의 입장 또한 지난 세월동안 나에게 무수한 사형선고를 언도 했던 얼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법원 판사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사건기록들이 메마른 먼지처럼 흩날리고 있다. 그 중에는 진실도 있을 것이고, 그 중에는 모함도 있을 것이고, 그 중에는 군중에 휩쓸려 억울한 경우들도 있다. 다만 불행한 것이 있다면 이 재판장에는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으며, 증인은 더욱 없다. 사건 기록지들은 한 건도 물증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인쇄가 되어있지 않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녹음된 것도 없으며, 동영상이라든지 물증이 될 만한 증거물도 전혀 없다.
 
막상 주님의 사형선고를 대면하고 보니 그 원고와 피고는 내 양심이라는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는 사람도 내 양심이며, 사형선고를 집행하는 사람도 내 양심인 것이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판사는 주님뿐이시질 않는가? 지금 인생 절정의 끝 쪽에 놓인 입장에서 보면 이제 꺾이면 황혼이질 않는가?! 남은 가슴은 평온한데 풀어야할 매듭은 몇 개 남아있으니 마지막 재판이 되든지, 아니면 다음으로 넘어가 재심의 기회를 기약하든지, 변론이나 한 번 해 보고자 한다. 사람이 살다가 보니 법정에서 밝히는 죄 말고도 참 많은 죄를 지으며 산다. 그것이 사회 통념이어서 무마되기도 하고, 그것이 너무 사소해서 외면되기도 하고, 아니면 강자의 편에서 약자를 무시해서 덮어지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떠벌이는 자와 침묵하는 자의 입장에서 귀 열은 자는 세 치 혀끝을 선택해 버리는! 그러나 그 작은 돌멩이 하나에 서로가 가해자가 된다는 인간의 굴레는 참 신비롭기도 하다. 아픈데도 너무 아픈데도 인륜이라는 도리에 참기도 하고, 숨겨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설령 이 사순절 동안의 십자가의 묵상글이 스스로인 나에게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해도 그 피해자 또한 내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 험난한 고행의 언도를 수용할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곱고 예쁜 십자가의 길이기를 바랄 뿐이다. 주님께서 그 고통의 길을 가시면서도 어머니도 만나고, 시몬도 만나고, 베로니카도 만나고, 동정심이 많은 예루살렘의 여인들도 만나고! 갈 만한 길이었다고 가르치고 계시지를 않는가?! 그러니 시작하는 나의 십자가의 길에서 첫 번째 사형선고도 가볼만한 길이라고 생각해 본다. 가보고 싶었다. 오래 전 부터 가야겠는데, 가야하는데, 무엇이 잘못 되어서 토막이 나는지? 자꾸 토막이 났다. 그러니 사람 속에서 가지 못할 길이라면 이렇게라도 나의 십자가의 길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형선고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고, 십자가의 길도 지금 진행형이다. 내가 이 묵상글을 마치고 났을 때 새로운 제1처에서 시작하는 반환점이 될지? 아니면 마침 점을 찍는 부활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결심을 했으니 인도하심을 아버지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수밖에!  차분히 돌아보니 벌써 내 어린 날의 십자가의 길을 열어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열어지지가 않는다. 주님을 따라서 기꺼이 사형선고를 받겠다던 티 없던 영혼이 혼탁하고 멍들은 길을 걸어 온 입장에 섰다. 그렇게 맑았던 어린 날의 이 길이 부러울 뿐이다. 그렇게 맑게 주어진 그 길을 왜 좀 더 신선하게 걸어오질 못했을까? 이제는 그 길 앞에 설 수가 없다. 예전에 내가 섰던 그 십자가의 길 제1처가 아니질 않는가?! 아깝다. 애통하다. 그래도 이 길을 새롭게 가야한다. 주님처럼! 주님처럼! 주님처럼!
 
-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영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베드로1서 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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