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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가 되는 것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04 조회수655 추천수7 반대(0) 신고
 
 

 

하나가 되는 것 - 윤경재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는 우리가 흔히 예상하던 이야기 구조와 사뭇 다릅니다.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부자가 딱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합리적 사고를 지닌 우리가 이 예화를 읽으면 비약이 심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 부자가 지옥에 가야 했는지 또, 어떻게 라자로가 아브라함 품에서 안식을 누리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설명이라고는 부자는 살아서 좋은 것을 많이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으니 죽음 이후에나마 공평하게 처지가 뒤바뀌었다는 내용뿐입니다. 부자의 하소연에 “라자로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라는 아브라함의 설명은 현대인인 우리에게 한없이 옹색하게만 느껴집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납득하고 수긍할 만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부자는 열심히 일했거나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를 잘 붙잡고 유지하여 큰돈을 벌었을 겁니다. 요행히 부자인 부모를 만나 대물림한 부자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부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부자라는 역할을 즐겼고 그 사실을 자랑하며 지냈습니다. 첫 대목에서 그런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가 부유함을 자신에게만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루카복음서 12장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에서도 살필 수 있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소출을 많이 거두고 나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12,19) 

비슷한 예화에서 나오는 두 부자의 생각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머물렀습니다. 자신에게 공로를 돌리며 자신에게 보상하는 행태입니다. 누군가 도움으로 자신이 부자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그리되었으니 자신이 즐기고 마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만연한 문제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라자로는 자기 한 몸을 추스르기에도 벅차 동냥은커녕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사실 동냥 다니는 것도 큰 힘이 드는 법입니다. 오죽하면 음성 꽃동네 입구에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최귀동 할아버지의 말이 적혀 있겠습니까. 그분은 동냥 다닌 것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거두어 먹였습니다. 그 광경은 한 사제를 움직였고 세상에 꽃동네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화를 드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겠습니다. 자기 한 몸이 자기 한 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타인이 나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라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 속에서 전 인류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라는 요청입니다. 라지로의 가난이 라자로 한 사람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라는 의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소에 알아듣기 어려워 한편에 미루어 두었던 마태오 복음 내용을 꺼내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30)

이 복음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죄지은 것에 대한 징벌이 떠오릅니까? 죄지은 눈과 오른손을 잘라 버리는 비정함을 느끼십니까? 

늘 사랑과 용서를 말씀하시는 예수께서 냉정하리만큼 비장한 말씀을 하셨다고만 여기고 가볍게 알아듣는다면 무언가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비장한 말씀을 하셨는지 따져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처지에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죄에 물들어 아버지를 외면하고 찾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인류를 구하시겠다는 간절한 원망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 속에서 전 인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기르지 못하고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의 모습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죄지은 사람의 눈과 오른손을 잘라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몸을 잘라내신 것입니다. 당신의 눈을 빼어 던지셨으며, 당신의 오른손을 잘라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병고가 없고 죄 없으신 분이지만 몸소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수술하셨습니다. 병고와 죄에 물든 몸뚱어리들을 낫게 하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신 것입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며 하나라는 진리를 보이셨습니다. 나 하나가 곧 전체라는 진리를 몸소 보이셨습니다. 냉정함이 아니라 이 말씀 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깨닫지 못한 죄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와 남을 하나로 보지 못하고 차별하여 소외시킨 죄입니다. 타인을 나와 하나로 생각하지 못한 행위는 결국 우리 스스로 소외하게 합니다. 타인을 소외시킨 행위의 결과는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다.”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라자로가 아브라함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는 표현은 그가 평소에 남과 하나라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가난은 비단 개인의 탓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 사정을 헤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을 차별하지 않는 원리를 불교에서는 불이(不二)와 일즉다(一卽多)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진리를 깨달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이 진리를 입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일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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