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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아버지 마음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14 조회수727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순 제 4 주일 - 아버지 마음

 


 

 저희 큰 형은 해병대 특수수색대였습니다. 그 훈련하는 것을 들으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해병 수색대는 해병대에서도 특별히 차출된 해병대의 특공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장 먼저 적진에 침투하여 주요기물의 폭파나 주요인물을 암살 하는 특공대 중의 특공대입니다. 여러 가지 훈련을 하지만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방법도 재밌었습니다.

그냥 헬리콥터로 바다 한 가운데에 떨어뜨려 놓는답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침반만 보며 몇 시간이 걸리든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막걸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오랜 시간 수영하면서 오직 그 막걸리 한 사발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 막내아들이 집을 향하는 심정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망망대해에서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기 때문에 낙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은 수많은 극기 훈련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 훈련들을 다 마치고 나야 정예의 특공대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나가면 잘 살지 알고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기에 아들을 놓아주는 것입니다. 마치 망망대해에 놓아두는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지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을 두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아들을 잃을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다면 이전보다 더 성숙해져서 돌아올 것을 알고 바다 한 가운데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떠나보아야 집의 소중함을 알듯이 한 번 아버지 품을 떠나는 아픔이 어떤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고 난 이후에야 다시 아버지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이 죄를 짓게 내버려두시는 것도 이렇게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의 주제가 '탕자의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읽어보면 오늘 등장하는 세 인물 중에서 탕자의 역할이 가장 덜 두드러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들고 계셨습니다. 그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 사람들과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비유말씀을 하시는 대상은 죄인들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그런 죄인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아버지와 같은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만약 죄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작은 아들처럼 회개하라는 의도가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오늘 복음은 죄인들의 회개와는 거리가 먼 자신들을 특별한 사람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며 좀처럼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맏형과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세리들이나 죄인들보다 더 나은 존재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뜻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는 같지 않고 분리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에서의 맏형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느님을 더 공경하고 잘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하느님으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병든 사람에게만 필요하듯이 그들인 건강하다고 하니 의사가 필요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간디가 유럽에서 유학할 때 한 번 유럽종교에 관심이 있어 성당 미사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간디는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관심은 있었습니다. 미사시간 때 성당에 도착하여 들어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색인종은 다른 미사시간에 와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미사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는 인종을 차별하는 그런 종교는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고 다시는 성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 있는 많은 땅들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마구 침략하여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백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여겼으며 노예며 학살, 착취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맏형처럼 그리고 유다인들처럼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자신과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형이나 동생 모두 똑 같은 아들들입니다.

 

저도 유학하는 동안에 많은 한국인들도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흑인들을 연탄이라 부르며 그들이 가난하고 냄새나는 것 때문에 우리보다 못한 인종으로 말하는 경우들을 들었습니다. 백인들도 여름에는 흑인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그런 것으로 백인들을 깔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인들이 맡으면 마늘, 고추장 냄새가 나서 못 견딘다고 합니다.

사람의 존엄성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부자도 유식한 사람도 능력 있고 잘난 사람도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관심을 더 기울이십니다. 아픈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로 사람을 저울질하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큰아들은 자신에게 당연히 와야 하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평가한 동생에게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동생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더 화가 난 것이고 아버지의 자비에 화가 난 것입니다. 화가 난 이유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그만한 보상이 와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모든 자녀들이 다 똑 같이 소중한데도 말입니다.

맏아들과 같은 사람들을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사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많든지 적든지 이런 특권의식이 잠재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굶어죽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니 공부할 여건이 안 되고 그러니 또 가난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고 있다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도 그들 탓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실 돈이 많다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지수 1위는 제 기억으로 방글라데시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큰 아들처럼 만족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 크게는 유다인들 모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하느님을 믿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민족은 선택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민족들은 그들의 눈에는 탕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일지라도 사랑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니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께 화가 났고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바로 교회를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아버지께 씩씩대며 탕자민족들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교회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고 있는 지금의 유다인들을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말씀에서 맏형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백인과 동남아 인 둘이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인에게는 모르는 영어까지 써가면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었지만 동남아 사람은 하루 종일 사람들의 쌀쌀한 외면을 당해야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정말 강한 사람이건 약한 사람이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건 못해주는 사람이건, 사랑하는 사람이건 미워하는 사람이건 구별 없이, 모두가 다 하느님나라에서 만나 행복하게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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