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격차이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라 불행이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28 조회수477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은 그녀의 자서전 『Under My Skin』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고트프리트 레싱(Gottfried Lessing)과 살고 있을 때 성격차이가 이혼사유의 1위라는 것을 보여주듯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영국으로 가기 전까지 친구로 살기로 하고 영국에 도착하면 이혼하기로 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파경에 이르렀지만 뜻밖에도 우정(友情)은 자라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성격이 맞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다고 해서 화를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한 방에서 다른 침대에 누워서 두 사람 모두 담배를 피우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자 고트프리트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와 같이 성격차이를 느끼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불행이요.”
 
참으로 성숙하고 철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성격이 맞지 않은 사람과 사는 것은 죄가 아니고 불행할 뿐이다.
누구나 매일 그렇게 산다면 고트프리트가 말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의 삶에는 나름대로의 감정이 있고, 지혜가 있고, 도덕과 신앙(信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변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흥분하는 데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있다. 서로 다름이 때로는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고 인내심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죄가 아니고 더더구나
그 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리고 아무리
그 다름이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흥분하게 만들고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더라도,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원망한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같은 교회에 나가는 신자나,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라도 자신과 다르면 원망하는 수가 많다.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무도 있을 수 없는데도 나와 다름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각을 하지 않아, 자신을 탓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트프리트와 도리스 레싱 사이처럼 가족 간의 성격 차이, 교회 공동체 안이나 직장에서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 불편함은 존경심이나 친밀감만 해칠 뿐이다.
반대로 존경심이 없거나 친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다름은 분열과 분노와 원망과 괴로움과 상호 비난의 원천이다. 우리는 성격차이를 도덕적인 잘못이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여겨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수가 많다. 때로는 그럴 수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정직하지 못하거나 관계를 유지하는데 게으르면 관계는 깨어지게 마련이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불편하게 만드는 장애물만 될 뿐이다. 관계는 좋아하는 화초나 나무, 애완 동물 같아서 정성껏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관계가 유지 되지 않는다.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불편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럴 때에도 “불행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흠이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트프리트의 말대로 나와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죄가 아니라 불행한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비난 받아야 하는가? 비난하려거든 차라리 자연과 하느님을 비난해야 한다. 우리는 아낌 없이 주고 너무나 풍요함을 주고 다양함을 주고 같은 종(種) 안에서도 다르기도 하고 상상 이상으로 새로움과 영롱한 색깔을 보여주는 자연을 비난하기도 한다. 또 우리를 거대한 우주에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다양함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우주는 아직도 자라고 있고 변하고 있다. 하느님과 자연은 같음이나 획일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완성되어 나오는 자동차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환경, 기회, 섭리의 조합은 너무나 다양하고 각 개인의 DNA는 너무나 복잡하여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이렇게 태어나고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를 이렇게 다양하게 그리고 독특하게 만드신 하느님을 원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모든 것이 색깔이 같다거나, 꽃이 한 종류밖에 없다거나 모든 사람이 다 같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그 획일성에서 비롯된 평화(?)를 감내(堪耐)할 수 있을까?
고트프리트 레싱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이고 마르크스주의자여서 그리스도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서 스스로 사랑과 동정과 용서와 평화를 맹세한 우리들은 “성격차이는 죄악이 아니라 불행이다.”고 한 그의 말을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감정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감정은 실제로 이성(理性)이나 의지로 일어나는 한에서만 도덕적 평가를 받는다.
감정은 “의지의 자극을 받기 때문에, 또는 의지가 막지 않기 때문에” 의지적인 것이라고 불린다.
이성으로 감정이 조절되는 것은 도덕적 또는 인간적 선(善)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톨릭교리서 1767)
(로날드 롤하이저 신부님의 칼럼을 편집)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