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전례/미사

제목 [전례] 합장을 하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3,231 추천수1

합장(合掌)을 하며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

 

어느 본당에서 겪었던, 처음엔 아주 황당했지만 그러나 나중엔 기도 생활과 전례 생활에 많은 반성과 새로운 깨침을 주었던 일이 떠오른다.

 

어느 날 어린이 미사 후, 성당 밖으로 왁자지껄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유쾌한 소란을 흐뭇해하며, 아이들과 너스레한 인사를 나누던 중으로 기억한다. 미사 때 말썽꾸러기로 자주 이름이 불리던 한 개구쟁이 녀석이 내게로 다가온다. 또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고?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 친구가 대뜸 항의를 한다. "왜 신부님은 미사 때 합장을 제대로 안 하셔요?" "?????" "그러니까, 왜 신부님은 미사 때 합장을 엉터리로 하시냐구요?" "음, 그러니까 ......"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선은 가르치는 사람 자신은 가르치는 그 내용을 정작 실천하지 않는다는 엄중한 고발, 다음은 사제로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대담한 지적, 나아가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냐를 묻는 강력한 항의처럼 들렸다. 별 신통한 대답을 못한 채 그 친구를 보내고 나서, 방에 돌아와 곰곰이 나를 돌아보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녀석의 당돌하고 괘씸한(?) 항의가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결론은 이랬다. 기도 때 합장도 제대로 안 하는 신부! 미사 때, 특히 어린이 미사 때 얼마나 자주 어린이들에게 '기도 손'을 강조했던가? 자신은 대충대충 팔을 벌리거나 합장도 제대로 하지 않는 엉터리 신부인 처지에 말이다.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 신부! 미사에 정성껏 참여해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처삼촌 묘 벌초하듯' 전례를 주례하는 꼴은 어쩌고? 그래 스승이 따로 있더냐, 나를 꾸짖고 일깨워 주는 사람이라면 지위가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스승으로 모셔야 마땅한 일이다. 신부라고 또 나이가 조금 많다고 기도할 때 기본 자세쯤이야 소홀히 할 수도 있다는 면책 특권이 주어질 리 없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크게 깨쳤고, 그 후 그 꼬마 녀석의 말을 스승으로 삼아 기도, 특히 전례 때 나의 흐트러진 동작과 자세들을 돌아보고 고칠 수 있었다.

 

 

공동 기도 때의 자세

 

원칙적으로 전례가 하느님을 지향해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기도라는 큰 제목 밑에 수렴될 것이고, 특히 전례가 일반적으로 여럿이 모여 함께 거행한다는 점에서 개인 기도보다는 공동 기도라는 소주제에 귀속될 것이다. 그래서 전례는 그 공동성이나 일반성 때문에 순서와 방법에서 정해진 규정이나 규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전례는 개인적인 응용이나 변용이 아주 많은 제한을 받는다는 특성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례 중에 필요한 동작의 일치나 자세의 통일은 공동체의 신앙과 예배 속에서 일치를 드러내고 증진시키자는 참으로 큰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기도나 전례 때 외적 자세나 동작이 과연 그렇게도 중요한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경신 행위에서 외적 자세나 동작은 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태 6,5).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 경고를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터이므로, 눈에 보이는 그래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도의 자세를 경시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완전한 기도다.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은 내적 자세나 정신이 따르지 않는 외적 자세나 행동이다. 기도할 때 외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른바 형식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형식만으로 각질처럼 굳은 기도를 완전한 기도의 충족 조건으로 여기는 잘못된 사고를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것이다. 형식만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규정만이 틀림없이 채워진다면 만사가 형통일 거라는 잘못된 인식을 비난하신 것이다.

 

 

왜 굳이 고해성사가?

 

얼마 전 개신교 신자를 만나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토론에서 내가 이겼는지, 그 사람이 현재 예비신자 교리 중이다.) 그 때 주제는 여러 가지였는데, 한마디로 천주교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개인이 지닐 수 있는 내밀한 믿음보다 외적인 예절과 형식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다는 비평이었다. 특히 고해성사에 대한 질문이 그랬다.

 

죄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니 신부(인간)에게 죄를 고백하고 또 결과적으로 그 신부에게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괜히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형식일 뿐, 마음과 믿음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있는 지식 없는 지식, 손짓 발짓 다 동원해서 나름의 논리를 앞세워 열심히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는 눈치였다. 성령이 도와주셨던가? 갑자기 완전한 기도, 완전한 행동이라는 주제가 생각났고 그 설명이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다.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인사를 하느냐? '안녕하십니까?' 따위의 인사말을 하든, 고개를 숙이든, 악수를 하든, 하다 못해 눈짓으로 하든 어떤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왜 굳이 말이나 행동으로 인사를 해야 하느냐, 말이나 행동이 없으면 인사가 안 되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그래도 말이나 행동이 따라야 인사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렇다. 아무런 행동도 없이 마음으로만 인사를 했다는 것은 결국 전혀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사를 해야 할 사람한테 멀뚱멀뚱 두 눈만 뜨고 있었다면 교만하다거나 인사성이 전혀 없는 무례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 뻔하다. 아무리 속마음으로야 허리뼈가 부서져라 몇 번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고해성사 때, 마음으로만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소리를 자신이 직접 들을 수 있도록 '말'이라는 외적인 행동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설명을 덧붙였다. 마음으로만 한 인사가 완전한 인사일 수 없듯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는 것도 개인의 내면 세계에서만 끝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가톨릭에서 신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느님께 지은 죄에 대해 '완전하게' 용서를 청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완전한 일치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 '완전한 행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합장의 힘

 

어린 친구한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스스로 생각해도 참 많이 변했다. 특히 전례 때 주례자로서의 자세가 말이다. 무엇보다도 합장이다. 그 후 전례 때 주례를 하든 하지 않든, 손에 무엇인가가 없을 땐 언제나 반드시 합장한다. 사실 처음엔 특히 주례를 하지 않을 때, 전례의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하고 완전하게' 합장을 한다는 게 참으로 힘들었다. 그러한 자신이 어딘가 유치해 보이는 것 같고, 남이 공연히 손가락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합장을 오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체적으로 어찌나 힘이 들던지.

 

그렇게 합장을 고집(?)하며 지내던 중, 문득 나의 내적 상태도 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정성껏 합장하기 시작하면서 기도가 더 잘 된다는 걸 느꼈다. 미사의 각 부분이 더욱 의미 있어졌고, 나아가 합장뿐 아니라 전례 중 다른 모든 동작이 기도의 중요한 몫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합장의 힘이라고나 할까? 신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웠던 합장의 의미를 수십 년이 지나 몸으로 깨달은 셈이다. 그러면서 눈에 새롭게 띄기 시작했다. 미사 중 고사리 손을 정성껏 모으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기도하는 어린이들! 물론 그 친구들이 그 복잡하고 어려운 미사의 뜻을 다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기도를 바치고 있는가? 그 모습들에 담긴 아름답고도 맑은 영혼이 보인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가 18,17). 기도나 미사 중 언제나 합장을 꼭 하고 있는 신자들의 열심한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개는 그러한 신자가 신앙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도 비교적 다른 이보다 더 충실하다는 새로운 인식도 얻게 되었다.

 

돌아볼 일이 또 있다. 신학교 특히 소신학교 시절, 예절 중 합장을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합장을 하지 않은 채 폼잡고(?) 있다가 혼나기 일쑤였다. 그 합장의 모습이 신학교 고학년이 되어갈수록 그리고 신부가 되어 연륜이 쌓일수록 소홀해졌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예수님께서 힐난하신 형식주의자 '회칠한 무덤'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면으로 더 충실해져 외적인 무엇이 없어도 하느님과 내적으로 곧장 통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사실 점점 더 건성으로 기도하고 있었고, 하는 모든 예절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고 '개머루 삼키듯' 했다는 반증이다.

 

 

합장의 중요성

 

좀 지나쳐 보일 지 모르지만, 전례 동작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것은 합장이라 하고 싶다. 합장을 못하는 이는 기도할 줄 모르는 이며, 나아가 그때그때 요구되는 전례적인 행동이나 자세를 올바로 취할 줄 모르는 이는 완전한 기도를 바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말씀과 행동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헌신 그리고 경의는 마땅히 마음이 담긴 말과 동작과 자세로 표현되어야 한다. 정성이 가득하고 혼이 담긴 몸짓이라야 살아있는 전례가 가능할 것이고, 그때 완전한 경신 행위가 이루어질 것이다.

 

합장은 번잡한 삶으로 흐트러진 자신을 가다듬고 인간 내면의 고요를 얻기 위한 외적 행동으로서 중요하다.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합장을 해보라. 그리고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가 다시 천천히 숨을 내쉬어 보라. 모아진다. 들뜬 마음이 이내 차분해지고, 그 복잡하고 다급한 삶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걸 느낄 수 있다. 두 손이 아니라 열 손이라 하더라도 다 감당 못할 일상사가 숨을 멈추게 된다. 삶의 소란과 불안이 잠시 정지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마태 6,6) 기도하는 일이 올바르고 합당한 합장으로 쉽게 가능해진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 또 그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합장을 해야 한다.

 

또한 합장은 순종과 항복과 평화의 표시다. 옛날 합장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표시였다고 한다.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면서 마땅히 보여야 할 비무장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예컨대 사제 서품식에서 서품자는 수품자의 합장한 손을 그러잡고 수품자에게서 순명 서약을 받는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합장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 맡긴다는 철저한 포기와 항복, 온전히 인내롭게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기품 있는 인간의 행동이다.

 

"명상에 잠겨 영혼이 하느님과 홀로 머물 때면 마치 밖으로 흘러 넘치려던 마음의 샘물이 한 손에서 다른 손을 거쳐 다시 안으로 흘러들어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라도 할 듯 손과 손이 절로 깍지낀다. 이것은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동작, 숨어 계신 하느님을 간직하는 동작이다. '하느님은 내 하느님, 나는 하느님의 것, 그리고 우리는 안에 함께' 머문다는 표현이다.`......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자는 두 손을 펴서 마주 대어 합장한다. 수신(修身)과 숭배를 말하는 자세다. 겸손하고 차분하게 말씀을 아뢰는 한편 귀담아 듣는 경청의 자세다. 자기 방위에 쓰이는 손을 고스란히 묶어 하느님 손안에 바치는 것은 항복과 봉헌의 표시이기도 하다."(과르디니, [거룩한 표징], 분도 출판사, 1976년, 16면)

 

 

남나물 콩나물의 변

 

그런데 덕이 부족해서 그런지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미사나 전례 때 교우들이나 주례하는 사람의 자세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버릇이다. 남나물 콩나물 격이지만, 다른 이들이 취하는 전례 때의 자세 특히 합장을 하는가 안 하는가를 자주 살핀다는 얘기다. 각양각색이다. 제대로 합장하는 사람들은 10%가 채 못된다. 많은 사람이 손 깍지를 껴서 아랫배에 붙이고 있다. 어디 배라도 아픈 건지? 어쩌다 차려 자세로 있는 사람도 있다. 군대 사열식에라도 참석을 하고 있는가? 더욱 가관인 것은 떡 하니 팔짱을 끼고 있는 교우들도 꽤 있다는 거다.

 

가끔 다른 신부들과 미사를 공동으로 드릴 때가 있다.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가 많다. 어떤 주례자는 아예 제멋대로다. 잘못 본 것이길 바라지만, 도대체 기도하는 사람의 경건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경우도 있다. 저렇게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두고 신자들이 뭐라고 할까?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신심을 고양하고 주도하는 데에 주례자의 동작과 자세가 결정적이란 걸 모르는 주례자는 없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전례를 모독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주례를 맡았을 때가 공동 집전 때보다는 사제들의 자세나 태도가 더 나아 보인다. 주례자라는 외적인 여건과 주례자로서의 심리적인 의무감에서 그런 대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러 사제가 공동으로 미사를 드릴 때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공동 집전하는 사제들 중 절대 다수가 자세를 엉망으로 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말이다. 그 여러 신자가 바라보고 있는데도 나 몰라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있는 사제가 없길 하나, 고작 잘해야 깍지낀 손을 엉거주춤 배에다 붙이고들 있다. 심하게는 의자에 앉을 경우 다리를 길게 뻗은 채 편안히 새끼를 꼬고 있기도 하다. 아예 한 쪽 다리를 다른 쪽에 포개 얹어두고 있는 것은 어쩌고. (여긴 그런 자세가 용인되는 서양이 결코 아니다!) 어디 그래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형식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아 보여,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까? '글쎄올시다'가 답이다. 우선 옆에서 보기에 전혀 마음이 담겨있어 보이지 않는다. 억지 춘향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해치우자는 무성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아름답고 경건한 전례

 

한 번은 어느 공동 집전 미사를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다. 전화 벨 소리에 수화기를 집어드니, 옛 본당 교우다. "신부님, 참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시데요.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미사 입장부터 퇴장까지 줄곧 합장을 하고 있던 걸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남이 좋다고 하니 나도 좋을 수밖에 ...... 자기 자랑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하지만, 좋은 뜻으로(?) 한 번은 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사제 생활의 반인 본당 신부 생활 8년 동안 운수 대통해 '엄마'(엄마가 불러주시길 바라는 호칭임)가 주방을 맡아주셨다. 그런데 어떤 일로 본당을 비워야 했고, 손님 신부님이 며칠 미사를 드려주셨다. 본당에 돌아와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듣던 중, "우리 신부가 미사 드리는 게 제일 좋아!" 하시는 게 아닌가. 제 자식이 귀엽다는 뜻인가? 그 이유는, 내가 드리는 미사가 그래도 경건해 보인다는 거였다. 자세와 동작, 어투 등이 모두 보기 좋다는 것이었다.

 

모든 전례가 아름다웠으면 한다. 참석자나 주례자 모두 경건했으면 한다. 마음과 몸,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완전한 예배로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그런 장소와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살아있고 향내 나는 전례가 되었으면 한다. 거룩하고 숨겨진 사건이 전례를 통하여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완전한 전례가 거행되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저 세계의 거룩한 현실이 피부에 와 닿고 몸 속으로 스미는 그런 생활한 기도가 바쳐졌으면 한다.

 

시작해 보라. 마음이 담긴 합장을 시작해 보라. 가능한 한, 적어도 미사 때만큼은 온 마음과 몸이 실린 합장을 해 보라. 미사와 기도가 아름다워지고 경건해질 것이다. 하느님 안에 잠겨 드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목, 1998년 9월호, 이현로 신부(청주교구 관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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