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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6 조회수1,122 추천수2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승천 대축일 -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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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시와 친하지 않은 저도 참 좋은 시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뭐, 미련 없이 이생의 소풍 끝내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오늘 미련 없이 이생의 삶을 마치시고 하늘로 ‘공식적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공식적으로’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상병 시인이 노래하는 ‘귀천(歸天)’에서처럼 예수님도 소풍 끝내는 마음으로 하늘에 올라가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그런 기분보다는 더 큰 것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요한 16,7)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항상 하시던 말씀입니다. 당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성령님께서 오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곳에 남아계시고 싶어도 그러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성령의 불로 태우는 것이 목적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면 우리에게는 ‘왜 예수님께서 떠나가셔야만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신 열흘 뒤에야 성령님은 ‘공식적으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치 육상경기에서 바턴터치 하는 것처럼 두 분은 세상에 동시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성서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아담은 ‘사람’이란 의미와 ‘땅’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결과로 하느님은 ‘아담’을 저주하십니다. 사람만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도 저주하십니다. 사람이 죽어서 썩어야 할 뿐 아니라 땅도 저주받아 사막처럼 말라버려 사람이 고생하여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4개의 강이 흐르는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일과 생물이 풍성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마치 갈릴레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는 마치 사해(死海), 즉 죽은 바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릴레아 호수와 사해를 잇는 강이 요르단 강입니다.

인간은 지상낙원인 갈릴레아 호수에 살다가 죄를 짓고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인 사해로 떠내려 온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로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사막과 같은 우리 마음을 다시 동산으로 바꾸실 수 있는 ‘생명수’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인간은 사해에서 빠져나와 요르단강을 거슬러 갈릴레아 호수에 도착하면 목적을 완수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사해근처 요르단강 마지막 부분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출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죄의 용서를 받고 다시 성령이 쏟아져 바뀌게 될 새로운 에덴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에서 영이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이사 32,15)

 

죄로 인해 사막이 되어버린 우리 저주받은 땅에 예수님께서 생명수인 성령님을 뿌리셨습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을 보고 놀라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피를 보고 놀랄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으로 찔려서 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이 나온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바로 인간의 죗값입니다. 먼저 죗값을 치러야 성령님이 오실 수 있고 그렇게 우리 마음엔 다시 생명이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죗값을 치르고 생명수를 받은 땅은 이제 땅이 아니라 에덴동산이 되고 하늘이 됩니다.

그러면 된 것이지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야만 하셨을까요? 여전히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요한 3, 34-35)

또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요한 13,3-4) 라고 나옵니다.

 

요한이 말하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손에 주시는 ‘모든 것’이란 하느님의 ‘모든 것’입니다. 이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님, 즉 모든 것을 주신다면 아버지는 이름 외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사라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아버지는 이름만 있고 보이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에게 당신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까지도 줌으로써 자신은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받게 된 죽음의 벌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이 따르지만 유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겸손과 순종을 보시고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아드님께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상에서 아버지께서 당신께 베푸신 이 사랑을 당신의 교회에도 베푸시기 위해 겉옷을 벗으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왜 자신들의 발을 닦아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히 겸손의 행동이 아닙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인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행위이고 내일 있을 자신의 죽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겨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을 닦지 못하신다고 말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성령을 받아야 씻겨지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피와 물’, 곧 성사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거부하면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도 갖게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주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준다면 그 주시는 분은 이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기 때문에 ‘죽게 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님을 보내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듯이, 또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님을 교회에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늑방이 열리시는 것처럼 성령님이 내려오신다는 것은 곧 성자의 죽음이요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죽이시어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곧 사라짐입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활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 안에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영광이듯이, 아버지의 죽음이 곧 영광이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스스로에게 당신의 신성을 성령님을 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신비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남은 것은 교회이고 교회는 성령님의 성전이 됩니다. 교회는 마리아의 순교적인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교회에 당신 성령님을 주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고 계신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사랑과 평화의 당신>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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