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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을 통해서도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5 조회수491 추천수9 반대(0) 신고

 


1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 차별 대우를 하지 … 않으시고, …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

다.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어느 자매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부님, 오늘 미사중에 신부님께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데,

정말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감동했어요!”

 

그분이 그렇게 느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기도 하겠지만,

그 은총을 받아들인 자매님의 마음자세 때문이었다.

지금 이 시간 이곳에 하느님의 사랑이, 거룩함이, 용서가,

그분의 자비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 기도의 궁극적 목적일텐데 그 자매님

은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처럼 “달릴 길을 다 달리기” 위해 필요한 자세가

바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달리는 동안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 - 바리사이는 이 위험에 빠져버린

안타까운 사람이다 -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이 절대적인데 바리사이는 그걸

 구하지 않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다.

 

예수님은 윤리적인 판단을 잘 하지 않으신다.

아니, 윤리적인 판단은 뒤로 밀쳐두거나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고 주로 믿

음과 죄에 대해 말씀하신다.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왔을 때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보

라 하셨고,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밀 이삭을 잘라먹

었을 때에도

다윗일행이 여행중에 배가 고파서 성전에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훔쳐 먹

은 것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의 “쓰리꾼” 짓에는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중심이었

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께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

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판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옳게 여기는 사람, 하느

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매 미사때 마다 하느님의 성전에 나아와 그분의 현존 앞에서 십자

가 제사를 재현한다.

문제는 이 십자가 제사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냐는 것이다.

예수님만 지고 가신 십자가요 그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고,

현재 나에게 당면한 문제해결이나 나 자신의 평안만을 구하기 위해 그 자

리에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어제 사회복지위원 교육에서 강사로 오신 교수님이 자원봉사에 대해 설명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발적이라야 자원봉사다.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봉사는 자원봉사가 아

니라 일이다.

그리고 공공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서는데 현관에 깨진 유리병이 날

카롭게 흩어져 있어서 치웠다면

그것이 자원봉사가 되겠느냐?”고 물으면서,

“자발적으로 한 봉사활동이긴 하지만

공공의 유익보다 우선 자신의 안전을 위해 한 일이기 때문에 자원봉사라

고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류 전체를 위하여

 십자가 제사를 바치셨다.

 

언젠가부터 미사를 잔치에 비유하면서

미사가 하느님께 바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라는 생각을 등한시하게 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미사를 딱딱한 예식과 의무로만 여기는 것을 바꾸기 위해 그렇게 설명하

는 것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미사를 바쳐도 되고 바치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는 평범한 주일

행사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우리도 당신처럼 십자가의 길을 같이 가기를 원하시면서 제사를

바치셨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너희도

내 잔을 받아마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고 하는데,

사바는 인도말(산스크리트어) 사하(Saha)에서 나온 것으로,

의역하면 인토(忍土), 즉 참고 살아야 하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탐(貪: 탐욕)· 진(瞋:분노)· 치(痴:어리석

음)라는 삼독(三毒)의 번뇌를 겪어내야 하고,

오온(五蘊:색(色)-물질세계 지칭=육체, 수(受)=감각작용, 상(想)=마음,개

념작용, 행(行)=의지작용, 식(識)=판단작용)으로 비롯되는 고통을 참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이런 현세 국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

히 중생들 사이에서 참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일체가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되

는 세계가 사바세계이다.[네이버 백과사전]

 

예수님께서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신 것은,

우리도 당신처럼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불교도와 그리스도교도의 다른 점일 것

이다.

 

바리사이가 잘못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지 않은 점이다.

거만한 허염심에 사로잡혀 그럴듯한 말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

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업적과 공로에

 대한 자랑에 지나지 않았다.

이사야서 58:3에 나오는 말처럼 바리사이는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기 위해 “성전

에 올라갔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본래의 목적은 망각하고

말았다.

오직 저 자신에게만, 그것도 자기 자신의 선함과 정직함에만 관심을 집중

하였고,

또 그런 자신의 선함과 정직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보상과 선물에만 관

심을 가졌을 뿐,

세리처럼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의 가치”를 알지

못하였다.

 

게다가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는 떠벌리고 또 떠벌리고 그리고 끝도 없이 떠벌렸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 “꼿꼿이” 버티고 섰다.

 

그가 떠벌린 것처럼, 강도짓이나 불의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탄은 그 좋은 것을 도구로 삼아 그를 자만심에 빠트리고 결국

파멸에 빠지게 만들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은총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는 힘을 갖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바리사이의 경우처럼,

사탄의 악의는 우리가 그렇게 잘했다고 칭찬해마지 않는 선을 통해서

악을 만들어내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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