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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1주일 + 위령의 날 본문+해설+묵상>
작성자장종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9 조회수513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22─12,2

주님, 22 온 세상도 당신 앞에서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 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23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십니다.

24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25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26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12,1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2.8-9.10-11.13ㄷ-14(◎ 1 참조)

◎ 저의 임금이신 주 하느님,

영원히 주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 저의 임금이신 주 하느님, 주님을 들어 높이나이다.

영영세세 주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나날이 주님을 찬미하고, 영영세세 주님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

○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도다. ◎

○ 주님, 주님의 모든 조물이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주님 나라의 영광을 말하고, 주님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주님께서는 그 모든 말씀에 참되시고,

당신의 모든 조물에게 성실하시도다.

주님께서는 넘어지는 이 누구나 붙드시고,

꺾인 이 누구나 일으켜 세우시도다. ◎

 

제2독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 1,11─2,2

형제 여러분, 11 우리는 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2,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2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요한 3,16

◎ 알렐루야.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도다.

◎ 알렐루야.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시편 16(15),11 참조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주님 앞에서 넘치는 기쁨을 누리리이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지혜 11,22―12,2) 해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신다>


역사는 흘러 이스라엘 백성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고, 그에 따라 다른 백성들의 다양한 문화와 접하게 되고, 특히 그리스 문화와 접하게 되었다. 많은 히브리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화합을 꾀하는가 하면, 때로는 자기네 고유한 전통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지혜서는 그러한 문제 제기들에 응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오늘 독서 대목은 특히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개입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크신 사랑에 겨워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며, 모든 사람에게 자비롭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잘못을 참아 주고 용서하여 주신다.

하느님의 숨기운, 생명의 기운, 성령께서 만물 안에 계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 각 사람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악에서 벗어나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하신다.

히브리인들은 자기네 신앙을 다른 민족들의 문화와 철학에 맞추어 표현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지혜는 어떤 때는 위격화(位格化)하여 우리에게 제시되고, 어떤 때는 하느님의 섭리 및 하느님 자신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화답송(시편 145[144],1-2.8-9.10-11.13ㄷ-14[◎ 1 참조]) 해설

<저의 임금이신 주 하느님,

영원히 주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시편 145편은 하느님의 위대함과 충실하심을 두고 하느님을 기리는 찬미가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지극하며 모든 피조물들을 어여삐 여기신다. 그 중에서도 억눌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하느님께서는 피부색, 종교, 문화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귀중하게 여기며, 그 중에서도 억울하게 천대와 억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악마의 세력과 질긴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제2독서(2테살 1,11-2,2) 해설

<고생과 모욕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복음을 대담하게 전한다>


바오로는 몇 달 뒤에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두 번째로 편지를 보낸다. 부활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애타게 기다리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커다란 환난과 무서운 박해를 받고 있었다.

바오로는 그들에게 끝까지 인내하고 항구하라고 격려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게 된 위대한 인권과 소명을 깨달은 사람들이 온갖 환난과 박해를 무릅쓰고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가정과 국가와 인류사회를 실현하는 그날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어서 빨리 오시기를 기다린다 함은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인류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하고 목숨을 걸고 몸 바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따라 몸 바치고 목숨 바치는 무수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 그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땅 위에 세워진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정체를 밝히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하신 하느님의 풍요와 영광에 결정적으로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복음(루카 19,1-10) 해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갈릴래아로부터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여정 또는 새로운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결론에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이 일화를 배치한다. 예수께서는 따돌림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10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상상한 것처럼 승리를 거두고 제왕의 자리에 앉아 군림하는 메시아도 아니고, 다윗 왕권을 회복하는 메시아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허욕과 위선에 가득 찬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였다.

예수님의 그 같은 태도가 멸시와 천대만을 한껏 받아온 이른바 죄인들에게는 한없는 해방감과 기쁨을 안겨주지만 스스로 의인들이라 뽐내는 위선자들에게는 심한 반발을 일으키고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예수께서는 죄인 취급을 받던 자캐오라는 세관장의 집에 묵으시면서 세리들과 어울리셨다. 그리고 당신도 죄인 취급을 받고 가장 치욕스런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셨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억울하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버려진 가난한 사람들, 제3,4세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한 부류가 되고 생활을 함께 하고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의 절실한 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아 해결하는 일에 몸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다가 죄인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사형까지 당하는 그리스도다운 사람들로 말미암아 버림받는 사람들이 똑같은 하느님 자녀의 떳떳한 인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묵상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지혜서에 의한 오늘 독서는 자캐오처럼 죄인 취급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심정과 태도를 설명해준다. 이유 없이 인간차별과 멸시를 당하며 마치 선조나 자기가 무슨 몹쓸 죄를 지어 마땅한 벌을 받고 있는 양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예수께서 오셨다. 특별한 재주와 능력이 없다거나 불구자, 정신병자, 나병환자라 해서 똘똘하고 잘난 사람들로부터 냉대와 조소를 받고 있는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예수께서 오셨다.

지혜서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넘치는 당신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나 또는 특별히 정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고 죄짓는 사람들을 차츰 차츰 고쳐 주고 악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실로 그 사랑이 없으면 온갖 생물과 모든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죽어 망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까지도 당신 인내와 사랑에서 비롯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회개하기를 인내로이 기다려 주는 분이시다.

사람을 회개하게 만드는 인내심이 깊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만이 세상을 바로잡아 새롭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다. 사랑만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을 생존케 하시는 유일한 이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창조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냥 흡족하실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못된 길에서 벗어나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인내로이 기다리고 계신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호응하여 모든 사람이 온갖 종류의 인간 차별과 장벽을 걷어치우고 서로 귀하게 여기고 참아 주고 위해 줄 때, 세상은 그 모습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영광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다음에 받으신 영광이다. 치욕스럽게 사형 받은 죄인이 되어, 죽은 다음에 받으신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하느님처럼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행동으로 사랑할 때, 하느님의 나라가 땅 위에서 실현될 시점에서는, 아직 야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박해와 사형까지 감수해야만, 죽은 다음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스도처럼 당하는 수난과 죽음만이 이기심과 자기과시욕이라는 악마의 세력을 깨부수고 새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기심과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편들어서 세력과 왕좌를 얻으려 하지 않고, 그와 반대로 그런 사람들로부터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천대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버려진 사람들과 동류가 되고 한편이 됨으로써 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는 떳떳한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불러일으키고 떨쳐 일어나게 하여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새 세상을 건설하신다.

예수께서 허기진 군중과 어부 같은 변두리 인생들과 창녀와 나병환자와 정신병자와 불구자와 세리와 한 패가 되고 동류가 되신 것은 그들 위에 쏟고 계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연민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세상살이에 무거운 짐을 지고 지쳐 허덕이는 인생들을 당신께로 부르고 감싸 안고 당신 자신으로 삼으신다. 보잘것없는 사람, 하찮은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자는 예수님 자신을 때리고 조롱하고 죽이는 자다. 이기심과 자기과시욕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악을 고집하다가 죽는 사람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디까지나 가해자편이 아니고 피해자편이시다. 그렇다고 가해자들을 편들어 피해자들을 아주 쓸어버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피해자들을 일깨우고 부추겨 가해자들을 회개하게 하여 악마의 손아귀에서 빼내 사람다운 사람들로 만드시려 하신다. 피해자들 가운데서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투쟁을 벌이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인생들을 해방함으로써 인류를 화해와 일치의 기쁨을 향해 인도하는 분이시다.

















위령의 날

(11월 2일)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기의 말씀입니다. 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7과 8ㄷ과 9ㄱ.13-14(◎ 13)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로다. ◎

○ 들으소서, 주님, 제가 큰 소리로 부르짖나이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주님, 제가 주님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주님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 ◎ 

 

제2독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마태 25,34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요한 11,25-26 참조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욥기 19,1.23-27ㄴ) 해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은 자기 변호인과 후견인이 살아 계심을 잘 알고 있다. 살갗이 뭉그러지고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다.

욥은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하느님께도 분명히 버림받은 듯한 상태에서 비참한 고독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같은 고독의 심연 가운데서 욥의 믿음은 놀랍도록 자란다. 비록 하느님께서 지금은 침묵을 지키지만, 어느 날엔가 반드시 당신의 정의로운 입을 여시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욥은 미래에 희망을 걸고 탄원한다.

자기는 얼마 안 있어 죽어가겠지만, 욥은 자기의 증언이 기록되어, 어느 날엔가 자기 송사가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되기를 기대한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욥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참상을 두 눈을 치뜨고 똑똑히 바라보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 마음속에, 그들을 통하여 엄연히 살고 계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화답송(시편 27[26],1.4.7과 8ㄷ과 9ㄱ.13-14[◎ 13]) 해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이 시편은 주님을 영접하는 시편이다. 보잘것없게 보이고 천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가장 애착하시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 하찮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아울러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 힘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절절히 느껴 하느님 아버지만이 자기 구원자요 생명의 바위임을 알고 그분께 온 힘으로 매달린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합당한 자세다. 이런 겸허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복으로 채워 줄 수 있고 그들을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며 악에서 구해 줄 수 있으시다.


제2독서(로마 5,5-11) 해설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

역사상에 살다 가고, 살아 있고, 살게 될 사람은 누구든 먼저 ‘죄인’의 신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의 신세일 때이다. 그런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사랑이 쏟아진다.

2코린 5,18-20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당신 아들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당신 계획을 선포하셨다. 그 때문에 우리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의미를 띠게 되었다.


복음(마태 5,1-12ㄱ) 해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빛나는 이 대목은 교회 초기서부터 그리스도인 생활의 대헌장으로 여겼다. 이 참된 행복선언은 마태 5-7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서 ‘산상설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상설교는 매우 장엄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시나이 산 위에서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새로운 모세로 등장하신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참된 행복이 여덟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처음 세 가지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3-5절).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네가 하느님께 온전히 종속되어 있으며, 온갖 좋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고 그 주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를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 ‘가난한 삶’이 비록 고달프고 비참하고 슬플지라도, 그들은 반드시 위로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삶’, ‘슬픈 삶’ 속에서도 포악해지지 않고 관용과 온유함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은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다. 올바른 일이란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일이다. 이기적인 자기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귀중하게 보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몸소 생활로써 솔선수범하면서 선포하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과 자세를 택한 사람들이다. 자비와 관용과 용서는 사람다운 사회공동체를 이루는 데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다. 깨끗한 마음은 이기주의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결단을 내리는 마음이다. 평화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된 상태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었으며,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불의와 모순과 갈등이 가득 찬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박해와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라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묵상

<죽음은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오늘 전례 전체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난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위령의 날을 지내는 참된 의미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여 슬픔에 잠기자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자는 데 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 눈에만 정의로운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오늘 첫째 미사 제1독서에서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고 말한 욥의 간절한 염원은 하느님을 마주 뵙는 것이 비단 자기 개인의 성취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나는 믿기지 않는 기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자녀들이 상봉하는 일이요, 인간 본성의 온갖 한계를 극복하고 인생의 마지막 위대한 변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 변화와 변형은 본질적으로 진리에 대한 전면적 이해와 주님과의 결정적인 합일로 이루어진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덮고 있는 두건을 벗겨 내실 것이며, 그 때에 올바르게 살아온 모든 사람은 사랑 속에서 그분 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죽음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권능을 행사하신다. 죽음 안에서 계약이 채워지고 당신 왕국이 완성된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중계자가 필요 없이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그 같은 개념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지상 생애와 시공 안에서 펼쳐지는 인류역사의 의미를 아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어떤 사람과 사건도 하느님 아버지의 시선과 판단을 피하거나 외면할 도리가 없다. 개인 생애와 역사는 순간순간 하느님의 판단을 받아 그 가치가 정해지고 죽음과 마지막 날로 이어진다.


<마지막 심판은 지상의 인간사와 인류사 안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공허한 말에 그쳐서는 안 되고 나날의 생활과 역사현실 안에서 그 의미를 실현해 가야 한다.

최후심판은 우리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무서운 선고 같은 것이 아니다. 최후심판은 우리 인생사와 인류사 한가운데서 이미 내려지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는 판정은 시시각각 내려지고 있다. 그 판단이 쌓여서 어느 날엔가 모든 사람 앞에 명백히 공개될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고 빼앗기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늘도 세상을 살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으로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복을 받고 있으며, 죽는 순간에 그 복의 정도가 결정되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과 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적으로 삼고 있는 셈이며, 그들은 이미 저주를 받고 있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에 저주의 정도가 결정되며,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완성, 즉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로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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