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미사 중의 성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노래하는 이는 기도를 두 배로 바친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할 때보다 노래를 부를 때 마음속 깊은 곳이 더 쉽게 동요한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기도들도 바로 노래인가 봅니다. 이 노래가 바로 노래하며 기도하는 사람인 다윗이 직접 지었거나 그렇다고 전해지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곧 기쁨과 고통, 사랑과 미움, 근심과 희망, 감사는 말과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느꼈던 강렬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꾸밈없이 웃고 그리고 울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곧잘 노래도 불렀습니다. 멋들어지지는 않지만 혼자서 즐겁게 흥얼거리기도 했을 겁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감정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고, 또 많은 경우 감정을 감추어야만 합니다. 릴케는 그의 ‘두이노 애가’(Duineser Elegie)에서 이러한 감정 감추기에 대해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행동하고 어두운 흐느낌의 울음을 삼켜버렸습니다.”하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감정 억제가 위험한 수준에 이르면 사람을 과묵하고 냉정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그와 달리 교회는 수백 년에 걸쳐 울 수 있는 은사의 기도를 전해왔습니다. 이는 탄식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은사의 기도로, 아픔을 씻어주고 위로받을 준비를 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노래하는 것에 대해 “cantare amantis est”, 곧 “노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재주”라는 또 다른 말도 하였습니다. 이는 가장 고상하게 노래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을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찬미가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긍정의 표현이며, 애가는 절망하고 빼앗긴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백 년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는 영적 음악의 엄청난 보화가 쌓여 있습니다. 그 보화는 그레고리오 찬가 곡조에서 시작하여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스키(Krzysztof Penderecki)의 루카 수난곡에 이르기까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수난곡으로부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winski)의 시편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풍부합니다. 평범한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런 음악의 대부분을 미사 때나 종교 음악 발표회 때 듣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탄원, 청원, 감사의 노래를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불러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들 또한 함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오래된 그리고 새로운 성가들은 신자들과 더불어 노래 부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이 바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공동체에서는 성가대와 회중, 선창자와 회중 사이에 경쟁이나 대립이 없습니다. 모두는 각자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역할을 가지며, 그리고 서로를 채워줍니다. 그들은 노래하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미리 앞당겨 선취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것을 영원히 흘러나오는 찬미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작 『신국론』의 결론에서 “그때 우리는 쉬면서 보리라. 보면서 사랑하리라. 사랑하면서 찬미하리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2012년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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