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침묵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사람에 대한 시편(시편 73)을 오늘날의 언어로 “날마다 말씀과 음성이 저를 감쌉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수다가 그 말씀과 목소리를 완전히 망쳐버립니다.”라고 재구성해 봅니다. 얼마 전 사망한 유대인 작가 마네스 슈페르버(Manes Sperber, 1905~1984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우리 시대에 수백만 명이 쉬지 않고 떠들어대지만, 그 수다는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비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게와 내용이 담긴 말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 전에 오래 침묵하고 주로 입을 열기보다 귀를 기울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요한 12,49)에도 해당됩니다. 복음인 예수님의 말씀은 침묵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적으로 말씀을 시작하시기 전에 침묵의 장소인 광야로 먼저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나누신 고독한 대화를 통해 나중에 사람들에게 전할 말씀을 다듬으십니다. 그 말씀은 칼처럼 휘두르는 우렁찬 말씀이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처럼 부드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는 다시 침묵하십니다. 아버지 앞에서 침묵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십니다. 간통한 여인을 끌고 나온 바리사이들 앞에서도 침묵하시고,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명에 따라 말씀을 선포하는 전통과 더불어 침묵하는 전통도 지켜왔습니다. 선포와 침묵은 교회 전례의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순서는 마치 들숨과 날숨, 밀물과 썰물 같습니다. 릴케의 기도서에서는 “저는 침묵하는 찬미가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전례에도 이러한 침묵 찬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침묵은 말이나 노래의 부재(不在)보다 더한 것입니다. 침묵은 수렴된 ‘현現-재在’(Gegen-wart), 곧 하느님을 향하여 기다리는 가운데 스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침묵은 잔 모양으로 위를 향하여 내뻗은 손들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사무엘은 하느님께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하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전례 안에서도 말할 때와 고요하게 귀를 기울이며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특히 성경 말씀과 강론을 통해 그에 대한 해설을 들은 후에, 그리고 영성체 후에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말을 아꼈던 시인 라이너 쿤체(Reiner Kunze)는 정치적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내 안에 말이 자라나도록 다시 침묵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전례에서 사람이 되신 영원하신 말씀께서 자신들 안에서 그리고 자신들을 통하여 형상을 갖게 되실 수 있도록 더욱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2012년 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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