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를 살다] 하느님 말씀에의 봉사인 강론 필자가 대신학교 부제였을 때 학장신부님 영성강화 시간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분도 예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라면서 다음의 우스개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강론이 8분 안에 끝나면 천사의 소리이고, 10분 안에 끝나면 사람의 소리이고, 10분이 넘으면 마귀 소리다.” 그렇다면 필자는 35년이 넘는 사제생활 중 마귀소리를 참 많이도 했습니다. 그 당시 학장님의 말씀은 강론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시간이니 만큼 가장 중요한 사제직무 수행이니 항상 준비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솔직히 강론은 하느님의 소리와 마귀 소리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두렵고 힘든 시간입니다. 강론 또는 설교,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미사 중에 강론을 한다는 것은 전에 비해 오늘날 우리를 싫증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미사는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지루하고 길다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강론을 짧게 한다고 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강론은 강론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뒷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보니 강론이 없다면 신자들은 더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강론이 없어도 미사는 「유효」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말씀의 생생한 선포는 시초부터 전례의 본질적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신약성경은 바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 화해의 말씀, 그리고 은총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십니다. 따라서 강론 없는 미사는 본질적인 것을 빼놓은 것입니다. 아무도 성변화 없는 미사거행을 유효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식탁도 풍성히 마련되어야 하며 봉독된 말씀에 대한 설명은 필연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각 시대에 따라 새로이 적응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 강론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며 “강론은 전례의 한 부분이며 특히 주일과 축일의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미사에서는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전례헌장 52항)고 명백히 밝힙니다. 강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찌우는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미사경본 총지침 65항) 또 강론은 인간의 말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이 힘든 목표 설정이 미사 강론을 여타 세상의 담화나 주장과 구별 짓습니다. 강론이 사람의 입에서 발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때문에 청중뿐 아니라 말씀의 선포자인 사제에게 있어서도 큰 과제인 동시에 간절한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제에게 일차적이며 가장 중대한 직무인 강론이 힘든 이유는 선포자 스스로 그 안에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강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경 말씀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됩니다. 강론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신자들을 열광시키거나 재미있게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론이 오락적 가치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강론의 효과는 신자들이 성당을 떠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실제로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의해 평가되는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책임을 지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떠나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좋은 강론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강론에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대답은 바로 변화입니다. 어떻게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의 강론이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느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훌륭한 강론은 예수님에 관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강론을 들을 때 강론이 재미있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바록 강론의 내용이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비워 드려 자신의 삶의 구체적 자리에서 변화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훌륭한 강론의 진정한 척도는 청중 각자에게 좋은 느낌을 주었는가 보다는 성당을 떠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여러 가지 신앙의 위기는 빈약한 강론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론 준비를 그날 미사의 주제인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지 않거나 윤리 도덕적인 훈계나 정치적, 사회적인 이슈에 중심을 둔 강론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려 오히려 신앙생활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본당 신부의 말을 듣고 따르던 중세시대는 이미 지나 갔습니다. 강론을 듣는 청중은 주간 내내 매스컴을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 보도와 크게 떠드는 주장들의 홍수로 압도되어 있습니다. 과연 주일날 한 시간의 신앙 선포가 그와 맞서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비록 미사에 참여하는 자들의 수가 감소된다 할지라도 공동체의 상당수가 이를 경청하고 있으면 하느님 말씀 선포의 유일한 기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마저 없다면 많은 신자들은 성경 말씀을 전혀 듣지도 읽지도 않을 것이며 더욱이 다른 선포의 말씀은 더더욱 듣지도 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굳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의 초대를 준비하여 성찬례를 올바르게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강론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특히 주일의 성찬례는 당면하는 삶의 문제에 대해 신앙에 입각한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됩니다. 시대와 관련되는 미사 강론은 언제나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미사 강론은 비록 그것이 상이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태양을 중심으로 위성들이 공전하는 것처럼 하느님 ­ 그리스도 중심으로 회전하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미사 강론은 임의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활동영역을 전혀 가지지 않으며 신자들의 강론자에 대한 요구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사제 한 사람이 일방적인 자기주장이나 삶의 변두리 이야기를 나열하는 식의 판에 박힌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은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쉽게 피곤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좀 더 실질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따뜻한 강론을 위해 사제들이 기도와 함께 강론을 준비한다면 신자들은 그 말씀에 분명 고마운 마음을 간직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개신교에서는 신도들이 그날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으면 예배가 끝나고 헤어질 때 “목사님, 오늘 말씀의 은혜 충만히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답니다. 그 인사는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보람이 되고 또한 가장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우리도 그런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제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진정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월간빛, 2013년 11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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