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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절 아침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24 조회수470 추천수7 반대(0) 신고
 
 
 

부활절 아침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 윤경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 8,34-38)

 

 

예수님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한 사순시기 내내 주님 수난을 묵상하며 한두 가지 극기를 실천하시느냐 수고하신 교우 여러분께 부활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가톨릭교회에 입문하면서 우리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장면이 바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죄를 용서받아 위로와 마음의 평화를 얻으며 현세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 교회에 입문했는데 막상 주님께서는 자신더러 제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손해 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소문에 듣자하니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 교회 사람끼리 똘똘 뭉쳐서 다녀, 장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하더니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살갑기는커녕 모르는 교우들 끼리 서로 소 닭 보듯 해서 큰 혜택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를 보는 눈은 왜 그리 도덕적으로 눈높이가 높은지 모르겠다고 투덜댑니다. 그래서 십자 성호를 긋는 일도 눈치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신부님들 강론 말씀도 부활의 영광보다는 십자가의 수난 영성을 더 강조하는 듯합니다. 성당에 들어가 보아도 눈에 제일 잘 띄는 제대 중앙에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고상이 커다랗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도 심하게 몸통을 뒤틀며 고통 받고 계신 예수상입니다. 개신교 교회에는 고작 십자가 나무만 덩그러니 달렸고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작게 매답니다. 목사님들 설교도 수난보다는 부활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영광스런 승리를 더 강조하는 듯 들립니다. 신자들도 어떻게 해서 성공했다는 간증이 줄을 잇습니다. 

제 십자가를 들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의 실제 예를 공관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으러 온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평소에 계명을 잘 지켜 대견하나 하나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크게 실망하여 슬퍼하며 발길을 돌려 떠나갔다고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는 일이 양립할 수 없는 선택 사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여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기 재산을 포기하기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가난하게 되어 사는 두려움이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깟 돈이 뭐라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해? 하고 그를 책망하셨나요? 아니면, 나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거야 하고 꼬리를 내리셨나요?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는 부자 청년과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둘 다를 얻는 길일지도 모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의 생각은 부자 청년이나 우리와 전혀 다르셨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제대로 길을 잡으면 하나를 잃는 게 아니라 둘 다 얻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 바로 뒤에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선택은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이라 아무리 예수님 말씀이라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저 복음서에 나온 말씀이니 더는 의심하거나 묻지 말고 그냥 넘어가자하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현세에서도 보상을 받고 내세에서도 상을 받는다고 세 복음서가 똑같이 전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부유한 포목상인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탁발승의 길을 걷고자 했을 때 그가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가난했었지만, 나중에 그의 영성에 감명을 받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재산을 희사한 사람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그 후로도 재산을 희사하는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현세에서도 백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실례입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천국에서 주님을 모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거라는 생각을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한쪽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쪽을 버리는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양 쪽 모두를 살리는 길임을 알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이 무엇을 잃고 얻는 이해득실만이 아니라 죽고 살리는 문제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잃고 얻는 것은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나 죽고 살리는 것은 너와 나 둘 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그도 살고 가난한 이들도 다 함께 살았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부자 청년은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려고 했으나 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은 나와 너를 모두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포기할 때 그는 혼자만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은 자신의 삶에서 수난 현장에 뛰어드는 일입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렵게 보여도 작게는 남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겸손하게 되면 타인뿐만 아니라 나도 사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도 자주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에는 이상하리만치 겁을 내곤합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처럼 무겁게 느낍니다. 자신의 본성을 믿고 뛰어들지 못해서입니다. 작은 일부터 자신의 본성을 믿는 연습이 부족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본성은 우리가 믿고 뛰어들면 놀라운 능력을 대신 발휘합니다.

불교의 선사들도 하나의 올바른 선택이 결과적으로 두 가지 일을 완성한다는 가르침을 깨달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것을 일도양행(一道兩行)이라고 부릅니다. 제대로 된 하나의 길(道)이 두 가지로 간다는 뜻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인 것 같지만 결국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기적 선택은 둘 다 죽이는 길이요, 자기를 비우는 몰아(沒我)적 선택은 둘을 모두 살리는 길이 됩니다.

신앙은 늘 그렇게 살아감입니다. 굳이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첫 시작이 망설여졌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살리는 선택을 하는 체험을 자신의 삶 속에서 체득하는 것이 십자가 신앙의 시작입니다.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한번만이라도 그대로 따라 살아보는 길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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