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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떤 꿈과 현실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30 조회수468 추천수3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3 어떤 꿈과 현실

어떤 꿈과 현실
꿈과 현실이란 참으로 묘한 관계가 있다. 어느 땐 그것이 투명 하게 보여서 인생길을 별 어려움 없이 쉽게 걸어가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땐 그것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마치 미로처럼 헤매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되 꿈과 현실이 결코 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집안의 빚 을 갚아야 하는 어려운 사정 때문에 사범학교에 들어가 선생이 되 었는데, 선생을 하면서도 나는 교직에서의 대부분을 섬마을에서 근무하며 젊음을 불태우곤 했었다. 그때의 섬마을은 좌천지였다. 그러나 나는 좌천지를 오히려 좋아했다. 후미진 곳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타고난 본성이었다. 아 니면 부모나 우리 조상 누군가가 유전자를 통해서 심어 준 씨앗이 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어떤 섭리의 계 획이었다. 좌우간, 나는 남들이 잘 걷기 싫어하는 길을 애써 즐겁 게 걸으려는 이상한 취향이 있었다. 사범학교 시절에 이런 일이 있 었다. 봄방학 때(그때는 3월 말이었다) 친구랑 함께 어떤 시골 산을 넘 어가는데 그때 저쪽 어딘가의 토굴 앞에서 문둥이 아저씨 한 분이 옷을 벗고 이를 잡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친구는 '에이, 재수 없다' 며 침을 뱉고 돌아셨지만 나는 왠지 그 정경이 이상한 감동 으로 스쳐 오면서 야릇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제 생각하니 일종의 '만남' 이었다. 그 후로 나는 토굴 앞의 노인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전에는 '산에 가면 문둥이들이 어린이 간을 빼먹기 위해 숨어 있 다' 는 말을 간혹 듣기도 했지만, 왠지 이를 잡던 그 노인의 모습이 장차 내가 걸어가게 될 어떤 수도자의 모습처럼 보여져 장래의 포 부를 얘기할 땐 엉뚱하게도 바로 그런 삶의 미래를 펼쳐 보곤 했었 다. 그리고 나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그 친구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자기 여동생을 나와 어떻게 연결시켜 보려고 만나서 술만 마셨다 하면 은근히 혼 사 문제를 꺼내 놓곤 했었다. 얼굴도 예쁘고 사람이 좋아 주위에서 도 권했지만 그러나 나는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을 대단히 억울하게 (?) 여기던 터라 결혼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번은 그가 그 얘기를 꺼낼 때 내가 솔직하게 '문둥이 사건' 의 얘기를 상기시키면서 내 미래는 아마 그쪽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고 하자 그 친구는 버럭 화를 내면서 "그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는 하질 말거라!" 하면서 대화를 끊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쪽에서 는 정말 진실한 꿈과 소망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늘 먼 거리에 서 나를 몰고 가는데 그래도 그 어딘가에는 이상한 연결이 있었다. 나는 섬마을 선생 후에 강원도에서 광부 생활을 제법 여러 달 했으 며, 그리고 정말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결국은 그곳도 나와 신학교 에 들어갔는데 이리저리 방황한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연이 아 니었다. 나이 서른넷에 신학대학에 들어간 나는 불혹이라는 사십에 신부 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가는 성당마다 거기에 나환자 정착마을이 있어서 그때마다 쉽게 그들과 잘 어울리며 지낼 수 있 었다. 이게 정말 인연이라는 것인지, 참으로 묘한 일이요 고마운 일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첫 부임지에는 백 세대가 넘는 큰 정 착 마을이 있었다. 한데 내가 자주 마을을 방문하자 그쪽 성당의 회장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자주 오시면 곤란하다"라는 말을 아주 정중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 하면 본당신부가 자기들을 자주 찾아 주는 것을 꽤나 좋아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는 그랬다. 내가 갈 때마다, 식사를 대접 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에게 따로 일당을 주고, 그리고 반찬 준비 도 별도로 장을 봐서 해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교회의 재정으로는 너무도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회장에게 그랬다. "앞으로는 교회에서 내 식사를 걱정하지도 말고 준비하지도 말 라. 나는 그냥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그들이 먹는 대로 얻어먹을 테니 그 순서만 정해 주면 좋겠다"라고 부탁을 했다. 그 러자 동네에서 야단들이 났는데 그들에게 이런 일은 생전 처음 겪 어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실천했다. 나는 그래서 첫 본당에 4년 반 머무는 동안 정착마을에 있는 나 환우들의 집을 모두 네 번 이상 돌아가며 먹고 마셨는데 동네는 그때마다 늘 잔칫날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신부 님과 함께 먹는다는 기쁨에 아무리 말려도 집집마다 돈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차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성당을 옮길 때마다 나는 나환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의왕시에 있는 '성 라자로마을' 에서 몇 달 머물 때에는 환우들의 공동식당에서 나오는 밥을 함께 먹기도 했 는데 그때 수녀님들과 다른 사람들도 나의 행동을 보고 모두 놀랐 다. 그리고 그런 인연으로 전국의 가톨릭 나환우들에게 성령 세미 나 지도를 한동안 하기도 했었다. 몇 해 전이었다. 소록도 성당에는 본래 외국 신부님들이 나환자 들을 위해 근 사십 년 동안 계속 이어서 거주해 오셨는데 이제는 한국 신부가 그 일을 하자고 위에 건의한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 신부들에게 일종의 자존심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그들이 일궈 놓은 터전에 우리가 불쑥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이었다!(1966) 이제는 외국 신부님들이 소록도에서 자진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이때다 싶어 교구장이신 대 주교님께 선착순으로 지원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 주셨다. 그래서 올 2월 5일에 한국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소록도 신부로 부임했는 데 생각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섬에 들어오던 날, 대주교님께선 나에게 축복을 주시면서 섬에 오래 있진 말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시다. 나는 이제 소록도에서 은퇴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다가 그들의 납 골당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결국 소록도에 들어오기 위해 그처 럼 멀고도 복잡한 길을 외롭게 걸어왔던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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