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2/18일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신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18 조회수529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3년2월18일 월요일 복음묵상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태오 25,31)

-------------------------------------------
(이 글은 거의 20년이 된 글입니다. 사순절 초입에 들어선 지금, 피정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조금은 긴 이야깁니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묵상하듯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부연설명이 필요 없이 그대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용서와 자기치유

우리 모두는 하나의 창(窓)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창은 마음에 보관되어 있지요. -
마음의 창- 그 창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물론 그 창은 하느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 수태되었던 그 순간부터 숨을 다하는 날까지 그 창은 우리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그 창은 아주 투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의 눈동자가 그렇게도 해맑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나 그 밖의 다른 짐승들의 눈동자를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이 깨끗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직접 통교가 가능할 정도로 맑고 깨끗한 창이 가능한 것이지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던 맑은 영혼을 우리는 아기 때 가지고 있던 거지요.
그러다가 언제인지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나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라는 존재를 의식하면서 관계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상처를 배우게 됩니다. 엄마의 모든 것이 아기에게 전달됩니다.
웃음, 눈물, 분노, 본능 모든 것이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그렇게 아기는 상처를 배웁니다.
온갖 종류의 관계들이 달려듭니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관계는 계속됩니다.
시간이 가고 상처에 면역이 되고 또 다른 상처를 만나고 아이는 커져만 갑니다.
상처로 얼룩져 가는 창을 가지고 말입니다. 점점 하느님과의 직접 통교가 불가능해지기 시작합니다.
빨간 물이 든 창으로 보는 세상은 빨갛게 보일 수밖에 없고, 노란 색으로 물든 창으로 보는 세상은
노랗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흙탕으로 얼룩진 창으로는 세상이 진흙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창으로 보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있는 그대로의 세상 보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그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 정말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을 노래하고 날아가는 새들과 들에 피어있는 꽃들과 대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즉 창을 원래의 모습으로 닦아내는 것일 겁니다.

창을 닦는 세 가지 작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과 짧은 시간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철저한 자기 의지 즉 자기 싸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첫 번째 작업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계십니까? 우리는 매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선택의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분명히 자신에게 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시겠죠?
이러한 선택적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창을 닦기 위한 첫 번째 작업,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분명히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먼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십시오.
"내가 너를 미워한 적이 너무 많았다"고, "네가 내가 아니기를 바란 적이 많았다"고,
"너를 용서하기가 너무 힘들었었다."고 깊이 용서를 청하십시오.
"너를 너무 소홀히 했고 무시했던 적이 많았다"고 용서를 청하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인정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시작입니다. 과거란 디딤돌일 때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두 번째 작업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아니 꿈속에서도 안하고는 못 베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 그것은 바로 '비교'입니다. 우리는 늘 비교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많은 고통이 창조됩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습니다.
단 우리는 그것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멋진 외모를 갖고 태어나고 싶지 않아 멋진 외모를 거부했겠습니까?
누구는 좋은 조건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태어났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정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열등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의 뜻을 가진 우월감이라는 단어도 있지요.
분명히 말합니다. 두 가지 모두 완전한 정신병입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같은 종류의 두 가지 얼굴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날, 우리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논리의 무기는 비교분석 해서 상대방의 위에 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 논리는 늘 배고픈 논리입니다. 늘 행복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늘 쫓기는 논리입니다.
즉 상대적 빈곤을 만드는 논리이며, 언제나 나보다 난 놈이 나타나는 논리입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비교논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비교라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비교란 반성이란 차원에서만 제대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실패를 맛보았을 때, 성공한 친구와 비교하십시오.
"아, 이러한 점이 나를 실패하게 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비교라면
그것은 건강한 비교가 될 것입니다.
그 이외의 비교란 타인에게 아픔을 준 다기 보다 먼저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작업입니다.
이 작업이 가능하다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작업도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소위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유리한 고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잠시 우리 성서를 묵상해볼까요?
교회 존립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엄청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2천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희망의 지평을 열게 해주었습니다.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당신은 진실을 반기신다는 것. 하여간 부활이라는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단한 사건을 처음 본 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님도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나 그 밖의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그 당시 철저한 남성중심의 율법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
그것은 바로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게 당신의 부활사건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엇 하던 여인이었지요?
성서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창녀출신이었던 여인이 바로 막달라의 마리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 아름답고 거창하고 교회의 존재이유가 되는 부활사건을 남자도 아닌 한 여인네에게,
그것도 온갖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출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주셨을까요?
여기서 우리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은밀히 몸을 팔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짐작이 가능한 것은 몸을 판다는 것은 그 당사자가 결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여인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사연이 많았겠지요. 몸은 자랐고 목에 풀칠을 해야겠고, 배운 것은 없고 흘러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늘 하던 대로 외간남자에 몸을 맡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조심한다고 했건만 두 사람의 현장이 소위 잘 산다는 인간들에게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머리채를 잡힌 체 개 끌려가듯이 끌려 나옵니다.
이 때 이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 정말 나는 죽을 죄인이다. 드디어 벌을 받는구나." 아닐 겁니다.
"정말 재수 없구나. 오늘이 바로 황천 가는 길이구나. 이 죽일 놈의 세상! 될 대로 되라."
아마 모르긴 해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죄의식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지요.
세상이 자신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는데 말입니다
계속 장면은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이 여인을 빌미 삼아 한 젊고 건방진 하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덫을 놓으려고 합니다.
젊은 남자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척 초라한 행색하고는 상관없이 범접할 수 없는 기풍이 흐릅니다. 고상한 늙은이들이 젊은이한테 말을 던집니다.
"이 보게, 젊은이.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네. 우리의 율법에 의하면,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의하면 간음하다 걸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젊은이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사람들은 그를 지켜봅니다.
드디어 젊은이의 입이 열립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이 흐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나이든 사람부터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젊은이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여인아, 너에게 죄를 묻던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느냐?"
"예, 선생님, 모두들 떠났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끌려올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다시 젊은이는 입을 엽니다.
"여인아, 나도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여라."

여러분, 바로 이 만남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전 존재를 뒤흔들고만 이 짧은 만남, 한 번도 한 인간으로서, 한 여인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이 가련한 여인의 마음에 처음으로 한 인간 한 여인으로 대접해준 이 남자.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실까?" 막달라의 여자 마리아는 그 젊은이가 그리스도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만남은 그녀의 모든 삶을 바꿔놓고 맙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그를 모든 것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디라도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니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잔을 마시기 위해 예루살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해골산이라고 불리는 골고타 언덕을 향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모든 업을 지고 힘겹게 올라가십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앞에서 온 몸이 벗겨진 채 무능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맙니다.
어디까지라도 따르겠다고 큰 소리 치던 사내대장부들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그리스도는 조용히 세상을 마감하고 맙니다.
사흘이 지나갈 무렵입니다. 막달라의 여인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후 그 무덤가를 찾아 정신을 놓고 달려갑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구칩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순간 온통 눈물범벅이 됩니다. 말 그대로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분께서 묻히셨다는 산으로 뜀박질합니다.
남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누구 내 주인님 보신 분 없나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외치며 산 속을 헤맵니다.
아마도 그 순간에도 11명의 사내대장부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활사건을 이 진정한 사랑에 드러내시지 않고는 못 견디셨을 겁니다.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처로 얼룩진 마음의 창을 닦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체험이 아닐까요?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무엇이다.' 이런 말들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나와 연결되지 않은,
내가 체험하지 않은 그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랑 받은 사람만이 사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 작업은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운 냅시다.

고맙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