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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화장실 [일그러진 모습]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4 조회수529 추천수0 반대(0) 신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4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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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루카 4,16 - 23>


오늘 복음 말씀의 앞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이신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라오신 지나온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에서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 자라오신 일들에 관하여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자신네들이 받아들이는게 다른 고장의 사람들과 같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보여줍니다.오랜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늙으신 할머니께서 참으로 존경하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어느날엔가 그분께서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것을 보고 나서는 목사님의 말씀이 은혜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살아온 나자렛 고향 사람들도 아마 그런 상황이다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인물인지 그들에게는 이미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가락 받을 짓들을 많이 했었는지 고향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의 속담을 들며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시는 이 말씀입니다. 

그저 할머니의 눈에는 거룩하게 보이시기만 하던 한 목사님께서 화장실을 다녀오시자 그만 그분에 대한 '신비성'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목사님께서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할머니의 가슴에 이제는 감동으로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거룩한 사람만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고 사람들은 단정을 내립니다. 

성전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같이 '위로부터의 영성'에 물들은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르지만 뭇 사람들은 그들의 외관 모습에 존경을 표하고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이들에 대해서는 멸시를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지금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버려진 이들과 함께 동행하는 겉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참 사람'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것들을 응시하며 위로 오르려고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래의 것들을 바라보시며 측은히 여기시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섬김을 받는 자리보다 멸시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에서 보잘것 없는 이들을 도리어 섬기고자 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이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외관에 눈이 먼 사람들은 목사님처럼 예수님께서 화장실을 다녀오시면 틀림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그들은 위로만 쳐다 보았고 아래로는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존경과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지, 멸시와 섬기고자 하지는 않는다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이기도 합니다. 

만일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며, 그분의 하느님 마음에 일치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오르려는 자'에서가 아니라, '내려가려는 자'에서 사람의 외관에 따라 제 마음이 결코 걸려들지 않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께서 겪으신 멸시와 적의 그리고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전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잘것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화장실'을 멸시하고 비난하면서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예수님의 반대자'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에 위로 오르려고만 하고 예수님의 화장실을 보고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천대하기만 합니다.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합니다. 버려진 보잘것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화장실을 보고서는 <우리와 같으신 분, 우리의 구원자>이시다고 예수님에게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악한 자를 두둔하는 악한 사람 편이 아니시고, 악에서 구원해 주실 착한 사람이다는 것에 희망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소외되고 소외되어진 가장 보잘것 없는(10가지) 사람이 바로 사렙타의 과부이며 시리아의 나아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래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아래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것에 깊은 시름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래에서' 예수님과 일치하며 '아래에서' 예수님에 의한 구원의 신비가 이루어 집니다. 온갖 수덕에 의한 자력 구원-상(나 홀로 수덕주의)은 화장실을 멸시하는 '위를 추구'하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그러진 모습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라자로' 비유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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