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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체와 하나에서 예수님에게 드러나시는 아가페 사랑의 도구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10 조회수511 추천수0 반대(0) 신고

각각 100 마리의 양을 하느님에게서 받은 '두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한 양치기는 100마리의 양 중에서 1마리의 양이 세상에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양이라서 세상으로 부터 소외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양치기는 나머지 99마리 양들이 더 중하다며 1마리를 버려두고 떠났습니다.그러다가 또 1마리를 잃게 되었습니다그러자 그 양치기는 역시 나머지 98마리가 더 중하다며 1마리를 버렸습니다. 그렇게 자꾸 자꾸 1마리씩 버리다가 결국 50마리 양들을 끌고서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다른 한 양치기는 100마리 중에서 1마리를 잃자 자기 목숨을 다해 그 1 마리를 지켜 내었습니다. 또 1마리를 잃게 되자 역시 자기 목숨을 걸고 1마리를 지켜 내면서 결국 100마리 모두를 데리고 하느님께로 갔습니다.이 두 양치기 중에서 누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의 기본을 모르는 삯꾼 양치기는 하나를 버린 것이 결국엔 전체를 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전체를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거짓말쟁이의 결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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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오 18, 12 - 14 참조>

사람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100마리의 양이 소중하다고 당연히 말하고 자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1 마리 양을 위해 찾아 가시면 나머지 99마리의 양들은 어떻게 하는가 하고 이해되지 않는 듯이 반문을 갖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99 마리의 양들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 1 마리의 양이다면 예수님께서 길잃은 1 마리 양을 찾으러 가시는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자신이 99 마리의 양들에 포함된다고 할 때와 실제로 자신이 그 1 마리의 양이 될 때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100 %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길 1마리 양에게 90 %의 사랑을 쏟는다면 다른 99마리의 양들에게는 나머지 10 % 밖에 사랑할 수 없다 라고 계산합니다. 이와같이 이기적인 사람에게서는 자기 이윤 계산에는 대단히 수치가 밝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윤 계산에서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1마리 양에게 100%의 사랑을 전부 쏟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99 마리의 각각의 양들에게도 저마다 다 100%의 사랑을 전부 쏟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힘과 하느님의 힘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란 전체를 내세우지 특정한 한 마리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세속적인 논리를 주장하면서 99마리의 사람들에게서 인정(영적인 교만)을 얻으려고 기대합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은 한 마리 양에게 사랑을 다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다른 진면목입니다.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엄연한 사랑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의 이기적인 사랑에 끌려 가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이기적인 사랑에 매여있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바로 길잃은 소외된 한 마리 양이라면 '이기적인 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전체를 내세우며 하나를 버리는 이기적인 사랑은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이지만, 하나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전체를 모두 온전히 하시고자 하시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영적인 사람을 사랑의 도구로 삼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아가페 사랑의 모습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를 위해 예수님의 전부를 내어 주십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의 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사랑의 탈을 벗고 하나가 바로 전체이다 하는 마음을 지니게 될 때에만 인간이 주장하는 바로 그 전체 중심의 사랑이 참으로 되어집니다.

어떤 자식을 가진 사람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하나에게 100% 당신의 아가페 사랑을 쏟으시면 내 자식에는 도대체 몇 %의 사랑이라도 줄 수가 있겠습니까.예수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내 자식도 소중합니다.어느 부모가 자기 열 손가락을 깨물어서 안 아픈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내 사랑은 하나 하나에게 빠짐없이 100%의 사랑을 다 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힘을 너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너의 이기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나에서 전체를 구하는 사랑이다. 너의 자식을 소중하게 하듯이, 나는 내 자식을 또한 사랑한다. 나의 사랑에는 모자람이 없다.]

인간은 전체를 내세우면서 하나를 버리기가 일쑤입니다.그래서 결국 '두 양치기'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명씩 한 명씩 버리고 갑니다.결국에는 전체를 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가 세속적인 계산에만 밝으면 이런 불행을 자초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전체를 위해서 어두운 골짜기를 다니시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와같은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을 따르는 거짓스러운 사랑의 논리는 전체의 불행을 결코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빛으로 드러나시는 아가페의 사랑은 '세속화'의 악한 결과에서 빚어지는 버리고자 하는 그 특정한 한 마리 양에게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 45)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이기적인 인간의 악한 사랑 계산을 용서해 주시기를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죄에서 해방시키고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용서를 비셨다'는 것은 자비란 '아버지께 달렸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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