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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락형 인간인가 도전형 인간인가? -하느님 공부- 2013.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8 조회수530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3.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2코린8,1-9 마태5,43-48

 

 


안락형 인간인가 도전형 인간인가?

 

-하느님 공부-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

 

위 시편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 수도승의 고백입니다.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화답송 시편 첫 구절처럼
한평생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아마 우리 수도승들처럼 ‘하느님’이름 많이 부르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새삼 하느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은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찾는 도전형 인간들인 우리 수도승들이자 믿는 이들입니다.
막연한 도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의 도전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에 도전하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도전의 궁극 목표입니다.

 

“안락형 인간은 쾌락을 우선시한다.
도전형 인간은 끊임없이 목표를 갱신하며 이를 위해 줄곧 힘겨운 노력을 한다.
바로 체 게바라는 도전형 인간이었다.”

 

어제 읽은 글귀가 신선했습니다.

정주가 안주가 되어 안락형 인간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
‘수도승다운 삶’의 서원에 따라 부단한 노력으로 하느님 사랑에 도전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영원한 로맨티스트이자 혁명가인
체게바라가 산 속에서 게릴라 활동 할 때의 인터뷰 내용 중 한 대목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텔리 의사가 이 산 속에 고생하느냐?”
“나의 이상을 위해서.”

 

우리 식으로 말하며
‘무엇 때문에 이 산속 수도원에서 고생을 하느냐?’가 될 수 있겠고
우리는 두말할 것 없이 ‘나의 하느님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도전형 인간입니다.
세속에 살아도 치열한 도전형 인간들을 대하면 저절로 존경심이 울어납니다.

어느 인문학자의 글을 인용합니다.

 

-열하일기는 중원을 가로지르며 시간적 변주를 꾀한 책이다.
목민심서는 시간을 따라가지만 순간의 공간적 배열이 두드러진다.
연암이 길 위에서 이용후생을 탐구했다면
다산은 유형지에서 목민관의 소명을 재현해 냈다.

다산과 연암이 보여준 그 길을 조용필은 노래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인터뷰에서 조용필이 한 말,
“열심히 부딪혀야 한다.
내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벽이 깨지든…

미래로 가야하니 과거의 저를 버릴 수밖에 없었죠.
…외롭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자신이 없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오, 이건 음악뿐 아니라 모든 공부의 원리가 아닌가.

그렇다.
이 천지간에 새로움이란 배움의 열정 밖에 없다.
그리고 배움이란 자신과의 대결이다.
자신을 넘어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곧 길이요 도(道)다(고 미숙).-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이분들 모두가 치열한 도전형의 구도자들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또 새로 시작하는 게 도전형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배움터’인 인생에서
부단히 하느님 사랑에 도전하며 그 사랑의 하느님을 공부하는 평생학인들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게 주님으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완전하다’는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관대함(generosity)을 뜻합니다.
마치
원숙(圓熟)하고 원만(圓滿)한 둥근 삶, 둥근 마음을 연상케 하는 온전한 삶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비로소 둥근 삶, 온전한 삶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외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무차별적 공평무사한 사랑을 닮아갈 때 완전한 삶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를 찾아주시는 은총의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져 평생과제의 완수입니다.

하느님은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푸신 은총을 그대로 주님을 찾는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충만한 기쁨이요 후한 인심입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에겐 큰 힘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바오로가 전해 주는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은총이
하느님 사랑 공부에, 하느님 사랑에의 도전에,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분도 성인은 규칙에서
은총과 노력이 하나 된 수도승의 내적성장을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그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어
항구히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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